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보아 May 18. 2024

나만의 특별한 단골 손님

호주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거의 매일 똑같은 시간에 와서 똑같은 메뉴를 시키는 손님을 꽤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카페에서 처음 일을 배울 때, 매니저는 나에게 단골손님 수십 명을 그들의 이름, 그들의 메뉴와 함께 소개해주었다.


솔직히 내 눈에는 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인데 이름은 각각 데이비드, 톰, 리처드… 게다가 메뉴도 다 다르다. 누구는 라테에 설탕 하나, 누구는 아주 뜨거운 카푸치노, 누구는 아몬드 플랫화이트에 설탕 둘! 종종 유별난 단골손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산기에 카드만 대고 있거나, ‘My usual.(늘 먹던 대로!)을 외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옅은 미소를 지으며 ‘Sorry, I’m new here, can you let me know your coffee?(죄송한데 여기서 일한 지 얼마 안 돼서요. 어떤 거 드시죠?) 해야 했다.


처음에는 모든 게 난감하고 어려웠지만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모두 다 같은 시간대에 와서 같은 메뉴를 시키다 보니 익숙해지는 것도 금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두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있고, 친절했기에 우왕좌왕하는 날 잘 기다려줬다. 하여간 이런 카페 문화는 한국인인 나에게는 생소했기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많은 단골손님 중에서도 내가 애정하는 손님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밥 아저씨와 케이 아줌마다. 두 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노부부인데, 매일 비슷한 옷을 입고,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들러 바깥자리에서 30분간 담소를 나누다 가셨다. 아저씨의 회색 플리스와 아줌마의 빨간 재킷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밥 아저씨의 커피는 따뜻한 롱블랙(아메리카노)에 이퀄(대체당) 두 개, 케이 아줌마의 커피는 뜨거운 플랫화이트(라테의 한 종류)였다. 나중에는 꼭 바나나 브레드도 함께 시키셨는데, 두 분의 주문이야 말로 너무나 똑같아서 입구에서 아저씨 얼굴을 보면 바로 카운터에 입력하고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면 아저씨는 손목에 찬 애플 워치를 계산기에 대고는 한마디 덧붙이셨다.


“We are very boring people, always same, same, same!” (우린 맨날 똑같은 것만 시키잖아, 재미없는 사람들이야.)


주문은 언제나 밥 아저씨가 하셨는데, 주문 전에는 다리가 조금 불편하신 케이 아줌마를 잘 앉혀주고 카운터로 오셨다. 주문이 끝나면 내가 가져다 드려야 할 물도 꼭 본인이 가져가셨다. 늘 카운터에서 바쁘게 서있는 나를 위한 배려였는데,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 눈썹을 올리시거나 씩 웃어주셨다.


가끔 케이 아줌마가 먼저 와계셨던걸 보면 두 분은 각자의 일정이 있는 게 분명했는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부부끼리 매일 커피 타임을 가진다는 것이 신기하고 흥미롭고 다정했다.

꼭 팔짱을 낀 채로, 못다 한 담소를 속삭이며 돌아가시는 뒷모습도 언제나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내가 곧 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전했을 때는 두 분 다 꽤 놀란 눈치셨다. 이민자가 많은 나라라 그런지, 두 분 다 네 홈이 어디길래? 하고 물으셨다. 흥미롭게도 두 분에게는 한국인 혼혈인 손주가 있고 그래서 한국도 꽤 여러 번 다녀가셨다고 했다.


카페의 모든 사람들과 이별을 앞둔 날, 나는 나의 특별한 두 분에게 커피와 함께 아주 작은 쪽지를 드렸다. 그간 짧은 영어로 고군분투하는 나를 항상 이해해 주시고, 예쁘게 봐주신 것에 대한 작은 감사 인사였다.

그러자 아주 예상치 못하게, 밥 아저씨는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그 쪽지 뒤에 나의 번호를 적어달라고 하셨다. 혹시라도 다시 호주에 오게 되면 나를 초대할 수 있게 주소를 남겨주신다는 것이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답이라 어벙벙했지만 그만큼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는 따뜻한 포옹과 함께 예쁘고 착한 딸을 두셔서 너무 자랑스럽겠다는 말을 꼭 엄마께 전하라고 해주셨다.


이 카페에서 일하면서 울고 싶을 만큼 힘들 때가 많았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사실 마냥 즐기면서 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 덕분이었다.

허둥지둥 실수투성이일 때도 눈빛으로, 짧은 한마디로 나를 보듬어 주시던 두 분. 특히 그 포옹과 한마디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두 분은 전화번호와 주소가 담긴 연락처를 보내주셨고 장문의 메시지도 남겨주셨다.

나 자신조차 애정해 줄 마음 없이 유독 팍팍해지는 것 같은 요즘, 두 분이 전하던 다정함과 사랑스러운 미소가 유독 그리운 밤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서 미처 다 전하지 못한 감사의 포옹을 드릴 수 있을까.

그러기를 희망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먼슬리 우울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