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2 스토너_존 윌리엄스 지음
소설이 이렇게나 눈에 안 들어온다고? 처음이었다. 제대로 읽기가 힘이 들었다. 스토너라는 책은 지독하게도 와닿는 부분이 없었다. 주인공 스토너와 나 사이에 조금이라도 공통점을 발견하려 노력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책의 서두에 나오는 언론의 찬사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독서회 회원들과 나의 시선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별 하나도 아깝습니다”라고 말해버렸다. 이번 책에 대한 별점을 나름대로 말하는 시간이었다. 위대한 작가들의 글에 평점을 말한다는 게 어색한 일이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책을 보았을 때 내용이나 인물이 나와 맞지 않아도 장면의 묘사 따위가 마음을 흔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용, 인물은커녕 장면의 묘사도 음울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책.
“결혼은 결혼할 시기에 그 사람을 만나서 하는 거야”라는 예전 회사의 선배 말이 듣기 거북했다. 한 사람이 좋아서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시기에 만나는 사람이 너라서 결혼하는 거라는 게 싫었다. 주인공 스토너가 그런 인생을 사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이디스를 첫눈에 반하고 결혼을 성급하게 진행했다. 결혼 첫 날밤부터 삐걱거리다가 1년 만에 그녀와 친해질 수 없다고 선을 그어버렸다. 그는 대학교도, 대학원도 주변의 누군가가 이끌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자신의 의지와 목표가 없이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살아왔다.
이렇다 할 사건이 크게 없었다. 그저 그의 아내 이디스는 스토너의 관심을 갖기 위해 고저를 오고 갔다. 그의 딸 그레이스 역시 자신의 집을 떠나기 위한 수단으로 임신을 택한다. 스토너가 캐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도 이혼을 택하고 불륜의 사랑을 끝까지 지키지도 않았다.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처럼 굴지 않았다. 로맥스와의 갈등관계에서도 스토너는 돌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누구나 갈등 상황에서는 감정이 드러나는 법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 안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으나 크게 점화되진 않았다. 스토너는 그저 꿋꿋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면서 지켜내야 할 것들을 간직하며 묵묵했다. 그 점이 나는 답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라면서 넘어가는 생각들.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점. 그러면 상대방은 스토너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잘 알 수 없다. (물론 그의 행동을 보면 대략 짐작은 가능하다)
스토너의 입장에서만 글을 썼고, 작가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친절히 설명해 주진 않았기 때문에 더 답답했다.(그래서 상상력을 더 발휘하기도 했었다) 다른 소설을 볼 때 나 자신이 신이 되었다면 ‘스토너’라는 책은 지극하게 현실적이어서 스토너의 생각만 알 수 있었다. 그 점이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인지시켰다.(이 책이 나에게 도피처가 될 수 없음에 아쉬웠다)
말수도 없고, 여자 경험도 없고, 사회성이 부족하고, 자신의 원리원칙만을 고집하는 스토너가 미웠다.(소설을 읽는 동안 스토너의 아내 ‘이디스’에게 몰입했던 것 같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가족과의 행복은 내팽개치고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이 나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아직 나에게는 가족과의 행복이 1순위다) 이런 마음 자체가 주변에서는 악당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주인공은 소설 속의 주된 배경인 미주리 대학교의 묵직한 바위와 같은 존재다. 그 자리를 지키며 할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남이 뭐라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다시 태어나면 계곡 속의 바위로 태어나고 싶어.”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가장 친한 친구의 무심한 듯한 말에 나는 비난의 화살을 쏟아냈다.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쉴 수 있다고 친구는 말했다. 그땐 알지 못했다. 그 친구에게 쉼이 필요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쉼 없이 달려온 친구의 배경을 생각하지 못한 채 돌이 웬 말이냐고만 느꼈다.
사람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 앞에서는 공감하는 척, 이해해 주는 척할 뿐이다. 그리고 뒤돌아서면 내 일은 아님에 안도하거나, 부러워하는 순간으로 끝이다. ‘스토너’라는 책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시선으로만 사건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거라고. 결국은 혼자 살아내고 견뎌야 하는 일이 인생임을 ‘스토너’의 삶에서 반추할 수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이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음을 일깨워주었다. 나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아가는 게 인생이다. 스토너의 아내 ‘이디스’가 자신의 아버지가 죽고 이미지를 탈바꿈하듯, 스토너 역시 캐서린을 만나고 자신을 다시 알아간다.
“누리기보다는 견뎠고
떠나지 않은 채 남았으며
물리치는 대신 물러나지 않았던,
모퉁이를 돌 때마다 되뇌는
평범하고도 오래된 그 이름,
윌리엄 스토너”
(책의 첫 페이지에 쓰인 말)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디까지 아는 것인가?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남편과 내 아이들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친구는 더더 이해할 수 없는 존재겠구나.....
여전한 고민거리다.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되 ‘그럴 수도 있겠구나’의 스토너적 관점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
의문을 가질수록 물음표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이 소설은 궁금증으로 시작해서 궁금증으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