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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우 Sep 27. 2024

8. 비워낼수록 삶은 커진다

20240927 소유냐 존재냐_ 에리히 프롬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_카를 마르크스          



“나는 OO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무슨 생각이 들어갈까. 축구를 잘하고 싶은 생각. 멋진 엄마가 되고 싶은 생각. 이 문장에서 OO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생각’과 ‘가지다’의 문제다. 최근 젊은이들은 의견조차도 소유하고 있다. 생각은 소유할 수 없고 동사형으로 “나는 생각한다”로 말해야 옳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사를 명사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단어의 선택은 소유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가지다(소유하다)’라는 말이 사유재산의 생성과 연관되어 함께 발전해 왔다. 때문에 지금 위의 문장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말을 먹었고 냉장고는 꽉 찼다


최근 나의 입버릇은 “엄마가 잊어 먹었어”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하루에도 서너 번은 나오는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잊음을 먹어버린 셈이다. 나는 왜 “잊었다”라고 다른 동사를 붙이지 않고 쓸 수는 없었는지, 내 언어의 선택이 먹는 것에 치중해 있는지를 다시금 고민했다.      


먹는 것에 치중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를 어떻게 때워 넘길지 요령을 피운다. 작심을 하고 요리를 하면 망쳐버리기 일쑤요, 나에게 요리는 10년을 넘게 해도 어려운 벽과 같다. 그래서 냉장고 속이 엉망이다. 애들이 먹다 남긴 음식들과 아까워서 못 버리는 음식, 서랍 구석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썩어가는 야채, 온갖 이온 음료들과 사탕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냉장고 크기는 최대인데 무언가를 더 넣을 공간이 없다. 언젠가는 먹을 것이라는 물질의 소유를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소유적 실존 양식의 인간이었다.    


  

장수의 비결, 돈


우연히 122년을 넘게 살아온 한 할머니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었다. 장수의 비결은 ‘돈’이란다. 모자람 없는 삶을 살았고 돈에 구애받지 않고 시간적 여유도 많아 스트레스를 덜 받음으로써 장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donga.com/news/article/all/20230228/118107601/1)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소유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다. 예전(저자가 말한 때)도 지금도 더 소유가 중요시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따라서 나도 소유적 실존 양식을 추구한다. 존재적 실존 양식을 추구하기에는 아직 돈이 부족하다. 당장 입에 풀칠을 하려면 우리는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몇 년째 찾는 현상만을 두고 보자면 나는 존재적 실존 양식의 사람이 되기도 한다. MBTI의 E냐 I냐의 문제처럼. E가 49%에 I가 51%라고 해도 이것을 내향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 않은가. 옳고 그름도 누군가의 견해일 뿐 모두에게 보편화될 수 없는 것처럼 소유냐 존재냐의 차이도 한 끗 차이다.



소유의 상실=두려움


“죽음 및 죽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근본적으로는 겉보기처럼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며, 만약 죽임이 이미 와 있을 때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소유물로 체험되는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 경우에 사람들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한다기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한다."
 _죽음에 대한 두려움_삶의 긍정_174p     


소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 이면에 있다. 혼자가 아니라 지켜야 할 가족이 있을 때 두려움은 높아진다.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건강과 돈이 있어야 한다. 없다면 죽음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을 것이다. 돈과 자식이 있는 한 우리는 소유의 양식 안에서 그들을 지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운명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아득한 목표지점이 어디에 있든 간에 끊임없이 성장하는 생명의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왜냐하면 그렇게 의식하며 능력껏 최선을 다하는 삶은 그 자체로 충족되는 것이므로, 그것의 성취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_새로운 인간의 출현_231p


완전한 노력을 하되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존재적 상태가 된다.      


“존재적 실존 양식을 명시해 줄 듯한 하나의 상징이 있다. 푸른색 유리가 푸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푸른색을 제외한 다른 색깔을 모두 흡수하고 통과시키지 않기 때문이라는 실증적인 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유리를 보고 푸르다고 말하는 실상은 그 유리가 바로 푸른색을 품고 있지 않은 데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푸르다고 부르는 근거는 유리가 품고 있는 것에 있지 않고 유리가 방출해 내는 것에 있는 것이다.”
_능동성_125p     

푸른색을 품지 않아야 우리의 눈으로 푸름을 인지할 수 있다. 소유하고 있지 않아야 우리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내가 어설프게 풀이했다. 하지만 소유하면서 존재적 양식의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사실 이 책의 저자인 에리히 프롬 역시 부유했기에 존재적 양식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록해 놓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소외된 기억 행위이다... 기록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기억력을 퇴화시키는가...” 53p     


기억력을 믿지 못해 기록하는 나는 여전히 ‘소유’를 좋아한다. 갖고 있는 것들을 버리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내 안에 가득 차 우리집 냉장고와 같다. 새로운 음식(생각) 들어갈 틈이 없다. ‘존재’적 인간이 되기는 아직도 먼 것인가. 소유와 존재를 둘 다 버리기 싫은 나는 속물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신도 책을 써냈으면서 자신의 책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소유였나 보다. 어쩌면 에리히 프롬 당신도 나와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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