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응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원하지 않는 다양한 상황에 접하곤 한다 그런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자기와 다른 강력한 힘을 가진 또 다른 자신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그런 강한 자신을 내면에 만들어 현실을 타개하는 힘을 얻기도 한다
어린 시절 혹은 청소년 시절 심각한 충격을 받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방어기제로 작용하기도 하며 이는 성장하면서 비교적 하나로 통합되는데 이 경우 자신의 기본 성향과는 다른 비교적 정반대의 특성을 지닌 인물을 만들곤 한다
이러한 성향이 둘 이상일 때에는 다중인격장애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 혹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 라고 통칭하며 심리학에서는 다중인격으로 언급한다 전혀 다른 사람이 극단적으로 다른 행동과 말을 하며 자신의 내부에서조차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와서는 갈등과 방해를 일으키고 스스로를 해치기도 한다
가까운 예로 <킬미힐미><피고인>에서 배우 지성은 해리성 정체감 기억상실 이인증 비현실감 등의 다중인격이 지닌 특성을 연기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해리성 장애에 관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증상은 일반적이지도 않고 비교적 특정한 인물에 국한되거나 영화 연극 드라마 속에서 유행처럼 연출 가능한 인격체로 우리 주변에서 찾기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좋은 의미로 이 유형이 적용되는 곳도 있다 연극인들이 자신의 배역에 충실할 때 혹은 가면을 쓰고 마당극을 하거나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쓸 때 저마다에 적절한 퍼스나를 데려와서 쓴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면이다 이에는 본인의 의지가 담긴 전체적인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 형식적 인격인체 하면서 그곳에 그 인격을 데려오는 행위로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다중인격과 질적으로 다르지만 상황에 맞는 인격체를 들여온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 둘 정도가 아니라 여러 개의 인격체를 지니고 상황마다 다른 얼굴을 하며 나타났다가 급기야는 그 인격체끼리 싸워서 가장 악한 인격체가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되어 주변에 나타난다면 어찌할까 정말 드라마 <킬미 힐미> 속 지성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주변인이라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까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이해도 용서도 되지 않은 상황들을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무슨 말을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무섭기도 하고 잘 이겨낼지에도 의문이 든다
해리성 장애와 변덕스럽고 감정조절이 어려운 성격장애는 차이가 있다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예측불가능하며 위협적이고 돌발적이며 충격적인 행동패턴마저 보이는 변덕스러운 성격은 대인 관계나 사회성 등이 어려우며 통합력이 결여되고 과대이상화와 평가절하라는 극단적인 사고의 양상을 보인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자각이 불안정하며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이중인격이라는 두 개의 성격이 한 개인 안에 동시공존하는 복잡한 정신을 소유한 성격장애이며 이는 때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며 다른 성격으로 인한 행동과 심리적인 부분을 서로 다른 인격체가 모른다는 점에서 해리성 장애와 닮은 점이 있다
왜 이렇게 해리성 장애와 경계성 성격장애 이중인격장애에 관한 내용들을 여기서 장왕 하게 풀어놓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그런 증상이 없지만 스스로 의도적으로 건강하고 힘센 이성적인 자아를 지닌 자신을 만들어 힘든 자신을 위로 하자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이다
영원한 내 편을 내가 만들어 나에게 힘을 주고 내가 어려움에서 벗어나자는 의미에서이다 아무도 내 편을 들지 않을 때에도 내 어깨를 툭툭 치며 <괜찮아 잘했어> <다 잘될 거야> <고생했어>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누구나 다 실수하며 살아> <난 영원한 내편이야>라고 아무렇지 않게 나를 위로하는 온전한 내 편인 나를 기억하고 때로는 내 마음속에서 꺼내어 위로를 받는 것도 좋을 성싶에서이다
두 개의 나를 가진다고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이들은 서로 다른 인격체가 서로 다른 인격체의 행동과 가치관 심리적인 문제에 대해 서로 모르지만 지금 언급하는 두 개의 나는 서로 다른 내가 서로 소통하고 서로 힘이 되고 보다 긍정적인 작용으로 보다 나은 미래의 나를 위해 행동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는 차이점을 지닌다
이는 이성적 이중성으로 자아들이 서로의 기억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연습으로 가능할 수 있다 자칫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기본의 인격체가 위로받고 싶거나 다른 생각을 갖고 싶을 때에 보조로 또 다른 강인한 인격체를 가진 자아를 만들어 위로하고 생각을 공유하고 더 나은 사람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유에서이다
본심이 감성에 강하다면 좀 더 강한 이성적인 자아를 생성하고 본성이 상처에 미약하고 상처에 고통받는다면 반대로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인 멘토를 찾아 그 특성들을 이성적 자아를 갖고 필요에 따라서 꺼내 쓰는 것이다 이 강인함은 따라 하면서 스스로의 약점을 보완하면 된다 옛말에도 <흉보면서 본 본다>는 말도 있다 사는 일이 힘들고 괴로울 때에는 재래시장이나 수산 시장을 찾곤 했다 그곳에서 날 것으로 번뜩이는 아주머니들의 생존 현장을 접하면서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을 본받곤 했다
아무튼 우리의 내면에는 변함없이 변화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도 인격체로 존재한다 욕구 신념에서 신체 반응 개념 사고 습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두 개 혹은 다중의 인격들이 때로는 통합되고 때로는 해체되어 나를 만들어 간다
그것은 티베트불교에서 툴파 Tulpa라고 하며 티베트어로 상상 속의 이미지들을 가시화시켜서 나타낸 것을 의미하는 것과 유사하다 또 다른 이성적인 자아를 가진 나는 나의 비서이자 긍정적 피드백 효과를 가져다주는가 하면 감각을 제어하고 스트레스를 완하 하며 의식적 수행과도 연관성을 갖는다 이는 자기 최면과 단순 명상으로 가능하다는 정도로만 언급하고자 한다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면 실제로 우리 속에는 또 다른 이성적인 자아를 가진 나로 살아가는데 이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 아닐까 태명이나 어릴 적 부르던 이름 학교 갈 때에 부르는 이름이나 다르듯이 혹은 성장하고 난 뒤 어떤 이유에서든 이름을 바꾸는 행위들 혹은 작가가 필명을 갖거나 아호를 정하거나 스스로 호를 지어 사용하거나 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또 다른 인격체를 더하거나 보태거나 새로 만들어 내는 효과를 갖고자 희망하는 마음이 담긴 보다 진취적이고 이성적인 자아를 갖겠다는 의지는 아닐까
또한 조부모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과 부모님 앞에서 혹은 부부로서의 자신 그리고 친구들 중 강한 자와 약한 자 앞에서 그리고 직장에서의 각각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그 가운데 자신이 가진 인격체들을 순간순간 적절하게 꺼내어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내 안의 가장 긍정적인 나를 지금 이 순간의 현실세계로 불러들이고 강한 나를 보좌하고 시각화하여 좀 더 강한 자신이 되어 힘들어하는 자신이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충분히 괜찮치 않을까 온전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건강하고 긍정적 나로 살아남기 위해서 뒤늦게 이름을 바꾸거나 콤플렉스였던 부분에 일부 성형을 하거나 이전과 다른 곳에 가서 이전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종교인이 되거나 자연인이 되거나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행위조차도 현실 속에서 자기 능력껏 잘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은 아닐까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끌어내는 혹은 만들어 내는 조건이나 능력 정도에 따라 새로운 자기 이미지를 만들어 현실을 살아내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아간다 그것은 이전의 내가 아니라 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전혀 새로운 나를 열망하는 마음이 담긴 행위라는 점을 잘 들여다보면 자연히 알게 되고 그런 상대의 아픈 마음도 자연히 읽을 수 있게 된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변함없이 나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은 바로 나의 눈빛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온전한 내편인 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보호할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도 사랑하고 수용하고 나아가 더 큰 세상 속의 사람들 무게를 깨닫고 그에 대응하게 된디 이왕 태어났으니 할 수 있는 한 가장 유연하게 잘 살아남자 내가 나를 진심으로 지속적으로 응원하면서
-월간 에세이 (통권 450호에서)
사진제공 성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