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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시인 혜월당 May 18. 2024

너무 잘해주지 마라

너무 잘해주지 마라 



예민한 성격이라 그런지 사람을 만나고 돌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한 말을 돌이키며 다시 생각하는 동시에 나의 말에 대한 상대의 반응 상대의 말에 대해서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에서 나의 행동을 재빨리 분석하고 피드백을 한다 

그런 후 내가 한 말들에 대한 실수는 없었는지 상대방이 나에게 실수 한 건 없었는지 순간순간의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상대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혹은 상호 관계저항에 대해서 혹은 앞으로의 대우에 대해서 판단하곤 한다 

관계형성 과정에서 이전과 달라진 건 없는지 혹은 좀 더 가까워졌는지 좀 더 멀어졌는지 여전한 지 등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생각하곤 한다 주로 어떤 장면을 위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데 나름 기준은 정해져 있다 그래서 함부로 사람을 만나거나 잘 사귀지도 않으며 대인 관계가 무척 까다로운 편이며 사람이 많은 자리를 잘 만들지도 않고 앞에 나서는 일은 더더욱 꺼린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가장 후회되는 것이 하나 있다 나름 친하다고 속엣말을 다 해버린 일이다 살면서 만날 일이 없는 관계라서 마음 놓고 말을 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편하게 이런저런 말들을 했는데 막상 두 사람이 만나는 상황이 연출되고 불현듯 나보다 더 쿵짝이 잘 맞는 관계가 된다는 것을 알고 나면서 내가 한 말들에 대한 뒤늦은 후회가 남는다 

그래서 이 친구 저 친구들을 섞어서 만나면 곤란한 상황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예를 들어 사회생활 중에서 만난 친구와 중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들 중에서 친하게 지낸 사이들을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에서 서로 알게 되면 그다지 좋을 것이 없어진다는 경험을 진하게 하게 된다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나름대로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걸 넙쭉 받아 챙기는 상대는 당연히 내 마음과 같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떤 기회가 되면 내가 상대를 생각한 것처럼 상대도 나를 생각하리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건 천부당만부당 千不當萬不當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라는 속내를 뿜어 댄 것이 잘못이다 그냥 차라리 대나무 숲에다 대고 말할 걸 나를 잘 안다고 이말 저말 하고 나니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상대는 전혀 딴생각을 하고 점점 호구로 생각하는 줄 몰랐다는 점 이건 순전히 그렇게 잘 대해 준 내 잘못이다 대접받고 싶어서 받고 싶은 만큼 똑같이 잘해 잘해 주면 상대방은 자신이 잘 나고 필요하다고 완전히 착각한다 절대로 받기만을 잘하는 사람과는 적절한 경계를 둘 필요가 있다 상대의 요구와 그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 같은 감정은 배제해야 하는데 성격상 그게 잘 안되고 늘 그것을 연습 중이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늘 당한 상황 그대로 또 당한다 상대는 늘 자신이 나보다 잘나고 자기에게 뭔가 얻을 것이나 바라는 것이 있어서 잘 대해 주는 줄 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냥 잘 대해 주고 친절하게 대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 

<너무 잘 대해주지 마라>고 말한 쇼펜하우어는 명언을 생각하면 잘 대해주고 받을 상처가 얼마나 크고 서운했으면 그런 말을 남겼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느낌을 잘 알 것 같다 자신이 받을 대우를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인데 그건 상대에게 오히려 자만의 빌미를 줄 뿐이다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 보면 상대가 얼마나 서운했을지를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역지사지의 배려심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니다 에코이스트의 성향이 1도 없는 나르시시스트라면 당연히 기대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취사선택을 하는 사람의 입장을 안다면 아무에게나 잘해 주는 것은 오히려 내게는 큰 독이 된다

세상을 살만큼 살았고 사람도 만날 만큼 만났고 상처도 생길 데가 없이 생겼는데도 여전히 어느 한 구석 빠꼼한 곳이 있었던지 오래된 사람도 믿고 만난 사람도 여전히 새로운 상처를 준다 그건 어쩔 수 없이 인간이 감정의 동물이고 살아 움직이며 늘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는 중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상처를 준 사람이 어쩌면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라고 반문하겠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각성하게 하고 관계의 거리조정을 다시 하는 계기가 되며 <남에게 잘해 주지 말라>는 어이없는 경고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기에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상대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알 리 없고 내가 잘해 준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쪽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고 당연하다거나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다면 그 선의의 배려는 오히려 독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 마음 같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또다시 자각하게 된다 

아무리 인간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서 최소한으로 한다고 해도 그 기대치는 심하게 잡아당긴 고무줄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그 순간만 잠깐 단단한 최저 기대치를 유지하다가 어느새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정말 쓸데없는 에너지를 또 낭비했다는 자괴감이 들곤 한다   

사람에 대한 실망은 처음이 아프고 상처가 되지만 비슷한 상황으로 상처를 받으면 무디어지고 오히려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는 느낌에서 한결 견딜만하고 이전의 다른 사례와 같이 당하지 않기 위해 그런 사람을 만나면 거리를 둔다 사람이 사람을 가까이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만 멀리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감정에도 민감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혈연 지연의 사이라고 할지라도 상대의 감정의 밑바닥을 읽고 나면 온갖 정나미가 다 떨어지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하물며 아무리 새로운 관계 오래된 관계라고 하더라도 혈연 지연이 아닌 남이라면 그건 무 자르듯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배신감이나 서운한 감정 만큼 오래가는 감정이 또 있을까 아홉 번 잘해도 한번 잘못하면 사이가 벌어지는 것이 인간관계이고 아홉 번 잘 못하더라도 한번 잘하면 또 이어가리라고 마음을 고쳐 먹는 착잡함 속에서 살면서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살아가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또한 인간관계이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마음의 폭이 넉넉하지 못한 때문인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는 것이 그 잘못을 가장 빨리 잊는 비결이 되곤 했다 내가 잘못했을 때에도 바로 사과를 하고 상대가 잘못하고 서운하게 했을 때에도 상대가 사과를 한다면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어떤 사과도 없이 계속되는 교만은 대개 서너 번 길면 대여섯 번까지는 봐주지만 그 이상을 넘기기란 쉽지 않고 그냥 말없이 관계를 청산하곤 한다 그렇다고 다 그런 건 아니다 대놓고 잘못을 지적하고 서로에게 맞게 고치고 지낼만한 사람을 그렇게 쉽게 내치지는 않는다  

때로는 상대는 관계를 청산하고 손절당한 이유를 잘 모르지만 말하고 싶지도 않고 굳이 손절하는 마당에 친절하게 말할 필요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상황에 상대는 의아해하기도 하지만 항상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상황이라면 어떤 미련도 생길 리가 없다 

하지만 상대는 친절하게 조공을 받던 습관에 익어 있던 사람의 경우에는 이러한 요원한 관계가 심리적으로 인정하기도 힘들고 불편할 것이다 오래전 읽었던 어느 책에서 <상대를 가장 빨리 잘 알려면 상대에게 최대한 잘 대해 주라 그리고 상대를 관찰하라 그리고는 그 친절에 교만한지 똑같은 분량의 배려를 하는지 부담을 갖는지에 대해 재빨리 파악하고 교만한 자는 가장 먼저 손절하라>고 한다

어쩌면 인간을 파악하는 조금은 나쁜 방법이 될지도 모르지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점에서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우리는 왜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할까 왜 쉬운 사람이라 여길까 참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고 배려하는 사람들을 습관적으로 편하게 함부로 대한다  

어쩌겠는가 그가 내가 아닌 것을 그러니까 절대로 함부로 잘 대해줘서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함부로 친절한 사람들에게도 경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진심이 얼마나 오래가는지에도 그 마음이 원래부터 그런 건지 어떤 목적이 있어서인지도 생각하면 대하면 된다 원래 친절한 사람도 예의범절에 깍듯한 사람들도 간혹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함부로 잘 대해줘서 안 된다> 평생 그 간단한 말을 잘 기억하기 위해 치른 그 대가가 얼마나 컸던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은 소소한 먼지조각 같은 상황이나 어휘들을 접하면 잘해 준 것이 호구가 된 기억들로 견딜 수 없는 상처로 아팠던 지난 날들이 되살아나곤 한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객관화 되어 있어 더 이상 지금의 이 현실에서는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뜻을 밝히지 않고 너무 잘해 주는 사람도 되갚을 수 있고 돌려줄 수 있는 영역 속에 있으면 모르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너무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서로 잘 대해 주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일들이 가능하다면 편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 마음의 빚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 역시도 함부로 타인에게 잘 대해 주는 것도 상대에게 마음의 빚이 되는 일을 만드는 것이 되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대놓고 잘 대해 주는 것도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지나친 것이 모자람 보다 못하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점을 인지하고 그가 누구이든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만 잘대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잘 대접받고나면 상대에 대한 기대치는 점점 더 자라기 때문이다 어쩌면 끝이 없을 수도 있다  

그건 자신에게조차도 해당된다 누구에게든 결코 지나치게 잘대해주면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진 제공 성경화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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