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달력을 넘기면 귀농 9년 차가 된다. 2016년 12월 28일은 남편과 2살, 3살이던 두 딸을 데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를 품은 의욕 넘친 해남에서의 첫날이었다. 2024년, 30대 후반이었던 남편과 나는 40대 후반을, 두 딸은 초등 고학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내가 사춘기를 지나올 때는 중학생 시절이었다. 요즘은 모든 것이 빨라져 초등 5, 6학년이면 사춘기가 온다고 한다. 가끔 부모교육이나 책, 미디어를 볼 때 그런 말을 들어도 흘려 들었는데 내가 갱년기를 맞이할 때 1번도 사춘기를 만난 것 같다.
시골로 이사를 와서 마당에서 뛰놀거나 동생이랑 노는 게 전부였던 1번이 글을 읽게 된 뒤로 제일 친하게 지낸 것이 책이다. 엄마 아빠가 바빠 책 읽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놀거리가 그 정도이다 보니 많은 책을 읽게 되어 아이는 똘똘이 스머프 같았다. 어떤 날은 똑순이처럼 야무져 보이다가도 어느 날은 또 너무 얌체 같고 잘난척쟁이같달까. 그래도 부모와 큰 트러블 없이, 건강하고 순탄하게 자란 편이었다.
공감을 잘해주는 남편이 등하교 픽업을 맡으면서 나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아이들과 나누게 되었다. 내 입장에선 징징거리는 아이들의 말을 듣지 않아 귀에서 피가 날 일이 없으니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엔 딸들과 거리가 조금 멀어진 것 같아 서운함 같은 감정도 있었다. 초등 저학년일 때 1번이 주로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반 아이들이 같이 놀고 싶어 장난을 치는 건데 진지한 1번은 괴롭힌다고 받아들였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길 해줘도 늘 반복되는 그 상황이 나는 싫어서 남편에게 떠넘긴 것도 있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2024년 초4가 된 1번. 저학년일 때도 투덜이 기질이 있긴 했지만 이젠 확실히 투덜이 스머프로 옷을 갈아입었다. 학교에선 자주 웃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집에서 1번은 세상 모든 게 불평불만이다. 게임기를 붙잡고 그 속으로 들어갈 듯 얼굴을 들이밀고 있을 때만 조용하다. 말 한마디 건넸다가는 나는 죄인이 된다. 하지 못할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확실히 사춘기가 온 것 같다.
그런 투덜이 스머프에게 사춘기 빼박 도장 같은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다. 여드름 패치를 사달라고 해서 사줬더니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정성스럽게 붙인다. 머리카락도 날 닮아 곱슬이라 빗질도 여러 번 반복한다. 머리를 묶고 앞머리 점검을 한다. 가방을 메기 전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몸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살핀다.
학교 안 가니?
가방을 메고 다시 거울 앞.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드름 때문에 폼 클렌징도 새로 사고, 기초케어 제품도 라인을 바꿨다. 어제 바꿔 줬으니 또 얼마나 거울 앞에 있을까.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면서 등교준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반의 여자 아이들 대부분 화장을 하고 다닌다고 말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실 어떤 말을 하든 뾰족하게 반응이 돌아오기 때문에 그냥 입을 다문다.
갱년기를 맞이하고 있는 나는 쳐진 피부와 주름 때문에 거울 보는 게 싫다. 하루에 양치와 세수할 때 외엔 거의 보지 않는다. 귀농 후 농사를 도우면서 짙어진 기미와 자꾸만 자라는 턱이 보기 싫어 거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갱년기와 함께 체력저하, 노화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아직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쌩쌩하고 팔팔하던 귀농 초의 나와 3살의 순수한 미소를 짓던 1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