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길을, 나는 풍경을..

3부. 생활운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by 농부아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까지는 어떻게든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장을 보기 위해 읍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진 못한다. 여전히 남편에게 얹혀 다니는 신세였다. 남편이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종종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운전한다 생각하고 주변 좀 봐. 길을 익혀 둬야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말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마치 이제 영상 그만 보고 숙제하라고 소리치면 자동응답기처럼 대답은 하지만 작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들 같았다.

주변을 보긴 한다. 단지 남편이 말하는 ‘주변’과 내가 받아들인 ‘주변’은 의미가 달랐다. 남편은 건물을 보고 길을 익혀 머릿속에 지도를 넣길 원했다. 하지만 조수석에 앉아 살펴보는 시골 도로의 ‘주변’은 농사일에 지친 나에게 힐링을 주는 최적의 코스였다.




읍과 집을 연결하는 시골길은 주변이 온통 논과 밭이다.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길이라, 나는 조수석에 앉아 바라보는 그 도로를 좋아한다. 봄에는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며 잠시 꽃길을 만들었다. 꽃길이 사라질 때쯤 유채꽃이 논에서 화려함을 뽐냈다. 여름에는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초록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우거졌다. 가을이 오면 나무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색을 바꿔 입었고, 황금물결의 출렁임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산 뒤로 지는 해의 마지막 몸부림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 풍경 앞에서 나는 길을 익히기보다는, 계절을 눈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겨울은 예외였다. 눈이 오면 그 길은 단숨에 다른 얼굴이 되었고, 우리는 웬만하면 차를 몰고 나가지 않았다. 미끄러운 도로 위에서의 운전은 남편에게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사계절을 반복하며 오가던 길은, 내게 ‘익숙한 풍경’이지 ‘내가 책임질 길’은 아니었다.

읍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호가 바뀌든 말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내가 좋아하던 식당이 문을 닫고 매매로 나온 걸 보며 아쉬워했다. 새로 생긴 카페를 발견하고 다음에 가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운전석에 앉는 순간, 같은 길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더 이상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도로의 상황을 살피느라 고개를 돌린다 하더라도 계절의 변화를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앞을 봐야 했고, 옆을 살펴야 했고, 뒤도 신경 써야 했다. 사람의 움직임, 차의 속도, 갑자기 열릴지도 모르는 차 문까지. 조수석에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운전석에서는 동시에 밀려왔다.


특히 읍내에서의 운전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논밭 사이에서는 예측 가능한 일만 벌어졌지만, 읍내에서는 예측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색했다.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왔고, 차가 갑자기 멈췄다. 그 모든 변수 앞에서 나는 작아졌다.


‘내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람이 만든 리듬으로 흘러가는 읍내의 길은 규칙적이지 않았고, 언제든 어긋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임기응변이 약한 내가 빠른 판단으로 리듬을 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통제할 수 없는 순간들을 돌파할 자신이 없었다.


그제야 남편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길을 익히라’는 말은, 단순히 어디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지를 외우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 말은 이 길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를 놀라게 할 수 있는지를 미리 알아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풍경만 보고 길을 보지 않았다.




길을 익히는 방법은 단순했다. 계속 다니는 것. 실수해도, 돌아가도, 다시 시동을 걸고 나서는 것이었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다. 길은 외우는 게 아니라 쌓이는 거라는 것도. 하지만 문제는 늘 거기서부터였다. 겁이 나서 운전대를 자주 잡지 않으니 길을 익힐 기회가 드물었다.


조수석에서의 나는 길을 ‘보았다’. 운전석에 앉은 나는 길을 ‘겪고’ 있었다. 여전히 남편이 운전석에 앉고, 나는 조수석에 앉는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보고 있는 ‘주변’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주변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아직은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지만, 나는 조금씩 자리를 옮기고 있다. 언젠가는 붉은 노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앞차의 신호를 읽는 날이 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운전대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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