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증을 통한 개념 명확화 목적의 질의 형식 서간문
1. 들어가는 말
학문의 함에 있어 명징함과 엄격함은 필수적이 되겠습니다. ‘신학’을 함에 있어서도 동일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제가 성서신학과 조직신학, 역사신학을 학습하기 위해 근처 도서관의 교양강좌가 아닌 전문기관을 찾아 학습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며, 학술적인 ‘지식’을 습득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기도 합니다.
0000을 통해, 전년도에 학습하지 못했던 복음서를 학습할 수 있어서 무척 기대되는 마음으로 매주 학습에 임하고 있습니다. 수업 중에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 주시는 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 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의 신성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성’에 관한 것입니다. 강의 시간에 질문을 드리고 추가 설명을 들은 바 있습니다만, 관련한 내용의 추가적인 확인 결과, 가르침을 받은 내용과 다른 의견이어서 그 내용을 설명드리고 필요시 추가적인 논의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강의시간에 질문드렸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강의 자료에 기술된 내용[2]
기독론의 차이 :
공관복음의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자(저 기독론), 요한복음의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게시자, 구원자, 선포의 내용. 예수 자체가 하나님 나라(고기독론)
➤ 관련 내용 중에 의문을 제기했던 부분
(질문) 요한복음에 기술된 예수님의 신성 중에서 “예수가 ‘하나님’ 인가요, ‘하나님 나라’ 인가요? 이 둘은 엄격히 구분하여 봐야 하는 것 아닌지요?
동 이슈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여러 학습 자료 중의 하나를 우선 공유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성에 대한 여러 진술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가 유대 땅에 왔을 때에도 그랬다. 예수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곤 했는데, 그 가운데는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이들도 있었다. 예수는 활동 기간 내내 그에 맞서는 유대인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들이 예수를 반대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과 달랐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와서 선포한 것은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통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는 것은 곧 유대인들이 믿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했음을 의미한다”[3]
기독론(Christology) 즉 그리스도론을 논하기 위해서는 조직신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논지를 성서신학에서 다루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조직신학의 근간을 성서신학에서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성서신학의 학습 과정에서 어느 학습 기회보다도 더 명확하게 정립된 그리스도론을 피력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론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성찰하는 것’이라고 정의됩니다. 이는 예수의 정체성(identity)과 그의 사명(mission)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을 조직신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이겠지요. [4]
따라서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예수(인성)와 신앙의 그리스도(신성) 중에서 ‘예수의 신성’을 먼저 확인한 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검증하는 방식으로의 논지 전개가 필요하겠습니다.
2. 주요 논지 (학습한 내용 요약 포함)
1)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신성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모든 이야기 중에서 아마도 요한복음이 교회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것 같다. 다양한 “나는… 이다”는 선언(“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은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이 이야기들은 공관복음서의 이야기들보다 더 길고, 인물들은 진화하고 구상들은 깊어진다. 오천 명을 먹이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폭넓은 가르침을 위한 뼈대가 된다.”[5]
요한복음에 대한 찰스 B. 쿠사의 설명 중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요약된 진술입니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육체가 된 말씀의 실체에 대한 명확한 증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첫째, 복음서의 서론은 창조 때에 현존했던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추출되고(“태초에”), 욥기 28장과 잠언 8장을 통해서 추적되는 유대 전통의 인격화된 지혜의 역할에서 지속된다. 이 육체가 된 말씀에는 창조의 부정이 아니라 창조의 성취가 들어있다. 둘째, 말씀이 육체가 되었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쳤다”(새개정표준역 [NRSV]: “살았다”). “만남의 장막”에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셨던 야웨의 현존에 대한 암시이다(출 25:8; 29:43-46). 하지만 말씀은 자신이 창조한 바로 그 세계에게 거부당한다. 셋째, 그래서 그는 상황을 변화시킬 조치를 취한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타락 이후의 아담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말이다. 바르트(Barch)는 “로고스는 적들의 입장을 취했다”라고 평가하고, 세례자 요한은 곧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증언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은 단지 창조적이고 성육 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말씀이기도 하다.”[6]
예수의 신성과 관련한 다른 진술을 추가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메시아, 즉 기름 부름 받은 자이지만, 이야기는 누가 메시아인지를 정의할 뿐, 메시아가 무엇인지 정의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엘리야가 하는 일을 똑같이 했지만, 회오리바람과 함께 사라졌던 엘리야가 그대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열왕 2:1~12 참조), 예수는 마지막 예언자이지만, 다른 어떤 예언자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다(요한 4:19,44, 6:14~15, 7:40.52, 9:17 참조).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전쟁을 통해 점령 군을 물리치지 않고, 세상이 들을 수 없는 진리를 말하며 어두운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요한 1833-38 참조) [7]
위의 진술은 성서신학의 관점에서 참고한 내용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한 조직신학적인 측면에서의 두 가지 연구방법적 접근을 살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연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접근방식이 있다.
하나는 ‘위로부터(from above) 접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from below) 접근’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방법론은 위로부터 접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며, 한 인격을 가지신 분이지만 두 본성을 공유하셨다는 신앙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접근법은 지금까지 정통 기독교가 고수해 온 방법론이다. 이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하고 계셨는데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성육신 하셨다는 사실을 선험적으로 주장한다.
아래로부터 방법론은 질문의 방향을 달리 한 것으로, 인간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를 묻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 중심의 사고전환이 가져온 관점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위로부터 기독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것이 라면, 아래로부터 기독론은 그의 인성을 부각한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 두 가지 접근법이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오래된 복음서는 ‘아래로부터’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고백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활과 영적인 현존과 재림의 빛 안에서 역사적 예수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위로부터 그리스도를 재인식하고 다시 새롭게 고백” 된 것이다. 예컨대, 마가복음서는 예수의 지상활동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요한과 바울은 위로부터, 즉 그의 선재로부터 시작한다. 그 사례로는 바울의 서신(고전 1:24 빌 2:511; 골 1:1517)과 요한복음(1:12), 요한일서(13), 그리고 히브리서(1:23, 8)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을 모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8]
즉, 예수는 성육신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러 오신 것으로
첫째, ‘말씀이 육신(sarx)이 되었다(요 1:14)는 것’과
둘째,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생명을 주시기 위함’(요 6:35; 8:12; 14:6; 20:31) 그리고
셋째,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로 오신 완벽한 하나님이자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
라는 정리입니다.
상기와 같이 간단하게 살펴본 바에 따르면, 강의시간에 설명해 주신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게시자, 구원자, 선포의 내용”이라는 정의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한 적절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다만, 설명해 주신 “예수 자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정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이해를 추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2)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고찰
“구약(과 유대교)에서 하나님 나라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확증한다” 고 톰 라이트는 그의 저서에서 명기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그의 논지를 아래에 인용합니다.
“따라서 의심할 수 없는 악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 백성을 구할 것이며 피조물 전체에 대한 자기 목적을 완성하실 것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창조세계를 완성한다는 이 두 가지 목적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수없이 많은 성경 텍스트에서 볼 수 있듯, 서로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 백성이 되어 그분의 통치 아래서 살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이 행하신 핵심적인 과업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되기는커녕 그 문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이스라엘 또한 죄 많은 인간들의 집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9]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것이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핵심 과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필수 구성요소인 ‘그분의 백성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세상을 바로잡음’을 실현하시고자 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레이첼 헬드 에반스는 그의 저서 <다시, 성경으로>를 통해 예수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그분은 주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공관복음에서만 그 같은 표현이 (동격인 ‘하늘나라’를 포함해서) 82번 나온다. 톰 라이트와 다른 신약학자들이 지적했듯이, ‘하나님 나라’를 저 멀리 어딘가 육체를 벗어난 영혼들이 모여 사는 낙원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통치다.
톰 라이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님의 설교에서 하나님 나라는 사후의 운명이나 속세를 벗어나 들어가는 내세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하늘은 미래의 운명이 아닌 일상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차원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 둘을 새롭게 하시고 영원히 통합하실 것이다.”[10]
하나님 나라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씀하실 때 이야기나 수수께끼, 비유를 사용하셨다. 천국은 밭에 묻힌 보물과 같다. 보물을 발견한 자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밭을 산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잃을 게 없기 때 문이다.
천국은 누룩과 같아서 여인이 밀가루 서 말속에 살짝 섞어 넣으니 마침내 반죽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천국은 가라지 사이에서 자라는 밀과 같고, 그물 한가득 잡힌 물고기와 같으며, 어두운 조개껍질 속에서 켜켜이 쌓여 가는 진주와 같다.[11]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통치>이며 <임박한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지만 또 우리 너머에 있으며, ‘이미’와 ‘아직’ 사이에 존재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실현시킨 ‘어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3. 결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한 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재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1) 지금 여기에 있지만 가려져 있고, (2)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이며, 임박한 (3)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지만 또 우리 너머에 있으며, (4) ‘이미’와 ‘아직’ 사이에 존재한다"라고 정리됩니다. 더불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난하고 온유한 사람, 화평케 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 하나님을 갈급히 찾는 사람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의 성육신을 통한 제2위로서의 하나님(성자) 임과, 그런 예수가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 대상으로의 ‘하나님 나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권의 서적에서 정리한 개념을 추가적으로 인용하는 것으로 결론 지원의 논지로 삼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역사비평의 도전에 대한 복음주의의 응답’에서의 변증입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는 개념적으로 완벽히 분리하여 기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 메시아로서 예수의 실제적인 자기 묘사는 예수가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어떠하리라고 제시하는 메시아상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심으로써 영원토록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게 하실 것이라고 가르치는) 기독교 구원론과 종말론은 메시아가 가져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는 바로 자신이 생애, 죽음, 부활을 통하여 그 나라를 가져다주는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야만 했던 것일까? 엄격하게 말하자면, 논리적으로 볼 때 필연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고난당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주는 메시아로서 행동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대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따라서 예수의 메시아적 기능에 관한 그러한 해석은 예수가 자신이 단지 메시아일 뿐 아니라 바로 그런 종류의 메시아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할 때 더욱 지지받을 수 있을 것이다.”[12]
두 번째는 본 과목 즉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참고도서로 선정된 <현대인을 위한 신약개론>에 기술된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또한 예수와 그분이 이 땅에서 가르치셨던 ‘대상으로의’ 하나님 나라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자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가르친다. 때로는 하나님의 통치(reign)를 이미 인간의 삶 속에서 현존하는 것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미래의 영역(realm)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하나님 나 라가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현상이며, 현재의 통치(reign)와 미래의 영역(realm)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13]
결론적으로 정리합니다.
‘예수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신학적으로 어떠한 근거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혹 다른 자료나 연구결과에 따라, 본 고의 주장을 논박한 내용이 있다면, 추가적인 논의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1] 대학원 및 연구원 등
[2] 2024.3.21(금) <예수와 하나님 나라> 김성희, 제3강 ‘교육용 슬라이드’ 인용
[3] <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 김호경, 2020. p110 인용
[4]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김용복, 2017 ; <침례교신학 톺아보기> 김용복, 2018 ; <침례신학대학원 ‘조직신학 II’ 2023년 2학기 강의자료> 김용복, 참조
[5] <신약성서개론> 찰스 B. 쿠사, 2018. P257 인용
[6] <신약성서개론> 찰스 B. 쿠사, 2018. P261 인용
[7] <그리스도는 질문이다> 웨인 A. 믹스, 2024. P116 인용
[8]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김용복, 2017, p293 인용
[9]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 톰 라이트, 2023, p66-67 인용
[10]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2009. 인용
[11] <다시, 성경으로> 레이첼 헬드 에반스, 2020, p258-259. 인용
[12] <역사비평의 도전과 복음주의의 응답> 크리스토퍼 M. 헤이스, 크리스토퍼 B. 안스베리, 2022, p262-263 인용
[13] <현대인을 위한 신약개론> 마크 알란 포웰, 2019, p75.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