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핑컬스타인 교수의 관점에서) / 학습 목적의 요약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교수의 관점에서)
Source: "Patriarchs, Exodus, Conquest: Fact or Fiction?" Israel Finkelstein
https://youtu.be/ck4ZJFXYzaM?si=H4eluvxIPeZGIXet
이 자료는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교수의 강연을 요약한 것으로, 족장, 출애굽, 정복이라는 성경 속 서사가 역사적 사실인지 과학적 증거를 통해 탐구합니다. 그는 이 이야기들이 실제 사건을 기록하기보다는 후기 군주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 유다의 이념적 및 신학적 목표를 반영한다고 주장합니다. 핑컬스타인 교수는 각 서사를 면밀히 분석하며 고고학적 발견과 역사적 맥락이 성경 기록과 종종 상충하며, 대신 당대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반영한다고 설명합니다. 궁극적으로 그는 이 이야기들이 과거의 직접적인 기록이 아니라 후대 저자들이 현재의 필요와 염려를 투영하여 재구성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결론 내립니다.
[참고]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교수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성경에 기록된 다윗 왕국이나 통일 왕국 시대의 규모와 중요성에 대해 회의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저연대기설(Low Chronology)"을 주장하며 다윗 시대의 유다 왕국이 성경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작고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출애굽 사건과 같은 성경의 주요 사건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최소주의적 관점에 가깝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시는 것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족장, 출애굽, 정복: 사실인가 허구인가?"라는 동영상 강연은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형성기에 대한 익숙한 이야기들을 과학적 증거에 비추어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강연은 이 시기의 성서적 서술이 기원전 2천년기의 실제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증거가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내용 전달이 복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강연에서는 두 가지 다른 성서 자료를 다루고 있으며, 학자들은 이를 저작 과정의 다른 단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 족장 이야기와 출애굽 이야기는 '오경' 또는 '토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역사적 내용이 많다고 여겨지는 창세기 부분의 J 원본은 전통적으로 기원전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 정복 이야기는 '여호수아기'에 서술되어 있으며, 이는 '신명기 역사서'의 일부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훨씬 후에 기록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 특히 독일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J 원본과 신명기 역사서 사이에 강한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교수는 이 두 자료 모두 후기 군주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며, 후기 군주 시대 유다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이념적, 신학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페르시아 시대의 관심사까지도 반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강연은 족장 이야기를 사례 연구로 삼아 심층적으로 다루며, 출애굽 및 정복 이야기는 간략하게 다루면서 동일한 규칙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각 서술에 대한 상세한 내용입니다.
족장 이야기는 가족이 국가로 성장하는 성경의 첫 대서사시입니다. 이는 전형적인 가족 이야기이자 헌신, 순종, 믿음 등을 다루는 보편적인 철학적 이야기로, 문학적으로 강력한 성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이 이스라엘 민족 탄생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연대기인지가 핵심 질문입니다.
(1) 아브라함의 역사성을 찾기 위한 시도와 실패
초기 성서 고고학자들의 견해:
많은 초기 성서 고고학자들은 신학 훈련을 받았으며,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 역사적 인물에게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의 전반적인 내용이 역사적이며, 전기적 세부 사항의 정확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 아모리 가설 (초기 청동기 시대 말기 – 기원전 2000년경):
.. 메소포타미아에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고 팔레스타인에서 고고학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학자들은 새로운 발견이 족장들이 역사적 인물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 알브라이트 같은 학자들은 성서 서술이 비록 늦게 편집되었을지라도 "진정한 고대 역사적 실재의 주요 윤곽을 보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 그는 메소포타미아 문헌에서 발견된 특정 개인 이름과 토지 매입 법률이 창세기 이야기와 유사하며, 족장들이 가나안 언덕 지역을 이동하는 유목 생활양식을 보인다는 점을 들어 족장 시대가 실재했다고 보았습니다.
.. 알브라이트는 기원전 2000년경 가나안에 메소포타미아 기원 유목 집단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찾기 시작했으며, 이를 초기 청동기 도시 문명의 붕괴를 초래한 침략자들과 연관 지었습니다. 그는 이 침략자들을 메소포타미아 문헌의 아모리인으로 식별하고, 아브라함의 이동을 당시의 교역망과 연결했습니다.
.. 그러나 이 가설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후속 발굴을 통해 도시 시스템 붕괴가 갑작스러운 침략이 아닌 점진적인 지역 경제 및 사회적 격변 때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아모리인'이라는 용어가 유목민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당시 가나안 인구는 주로 원주민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도시의 성장, 붕괴, 재성장은 인구 이동이 아닌 동일한 원주민의 오랜 순환 과정으로 이해되게 되었습니다.
- 중기 청동기 시대 가설:
.. 롤랑 드 보 같은 학자들은 족장들이 도시 옆에서 천막에 살았다는 성서의 묘사가 중기 청동기 시대의 특성과 더 잘 맞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언급된 주요 도시들(세겜, 벧엘, 헤브론 등)은 중기 청동기 시대에 요새화된 거점이었고, 마리(Mari) 문서에는 천막-도시 관계가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 족장들의 개인 이름이 기원전 2천년기 초의 이름과 유사하며, 누지(Nuzi) 문서에서 발견된 사회적/법적 관행(예: 불임 아내가 남편에게 여종을 제공하는 것, 자식 없는 부부가 노예를 입양하는 것, 사라-하갈 이야기)이 성서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되었습니다.
.. 하지만 이 주장 또한 곧 무너졌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중기 청동기 시대는 강력한 도시 국가, 거대한 요새, 궁전, 사원 등이 특징이었으나, 성서에는 이러한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언급된 도시들도 당시 가장 중요한 도시가 아니었으며, 유목민이 도시 거주자 근처에 사는 현상은 중기 청동기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족장들의 이름도 후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에도 흔했으며, 누지 문서의 관행은 기원전 2천년기와 1천년기 전반에 걸쳐 고대 근동에서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2) 족장 이야기의 후기 군주 시대 현실 반영
- 아나크로니즘:
성서 텍스트의 시대착오적 언급들은 족장 이야기가 후기 이스라엘 군주 시대의 관심사를 반영한다는 율리우스 벨하우젠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 블레셋인과 아람인 언급: 족장 이야기에 블레셋인과 아람인이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이들은 기원전 12세기에 남부 팔레스타인 해안에 정착했으며, 아람인들은 초기 철기 시대 이전에는 고대 근동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초기 국가들은 기원전 9세기에야 출현했습니다.
.. 낙타 사용: 족장 이야기에는 낙타 떼나 짐을 운반하는 낙타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낙타는 기원전 2천년기 후반에야 짐 싣는 짐승으로 길들여졌고, 기원전 1000년 이후에야 고대 근동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기원전 8~7세기 아시리아 지배하에 번성했던 아라비아 무역의 주요 산물(향료, 유향, 몰약)을 싣고 가는 낙타 행렬 이야기는 기원전 7세기 트자(Tell Jemmeh) 유적지에서 발견된 낙타 뼈의 급증과 일치합니다.
- 유다와 이웃 국가들의 관계 반영:
.. 아람인: 야곱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람인들은 기원전 9세기 초에 북쪽 이스라엘 국경에서 중요한 요소로 부상했습니다. 야곱과 라반의 관계는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의 복잡하고 종종 격렬했던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기원전 9~8세기의 아람과 이스라엘 간의 영토 분할을 반영합니다.
.. 암몬인과 모압인: 창세기 19장의 롯의 두 딸과의 근친상간으로 이 민족들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유다와 동쪽 이웃 국가들 간의 적대적 관계를 반영하며, 기원전 8~7세기에 이들이 "표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에돔인: 야곱과 에서(에돔의 조상) 형제의 이야기는 기원전 7세기의 인식을 고대 의상에 담아 표현한 명확한 사례입니다. 에돔은 기원전 8세기 후반에야 실질적인 국가로 출현했으며, 기원전 7~6세기에 비로소 유다의 심각한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는 에돔의 대규모 정착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 지리적 정보: 창세기 14장에 언급된 아미쉬파트(가데스)와 타마르 같은 지명은 기원전 7세기 유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지리적 정보를 제공하며, 메소포타미아 침략자와의 갈등 상황은 기원전 7세기 유다의 현실과 불길하게 유사했을 것입니다.
- 유다의 중요성과 운명 강조:
.. 독일의 성서학자 마르틴 노트는 족장 이야기가 원래는 분리된 지역 전통이었으나, 이질적인 이스라엘 백성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하나의 서사로 엮였다고 보았습니다.
.. 특히 아브라함 이야기가 유다의 초기 왕도인 헤브론과 예루살렘(살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이스라엘 역사 초기부터 유다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 기원전 8세기말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후, 유다는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복잡한 국가 제도를 발전시키면서 지역 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 이 시기(기원전 8세기말~7세기)에 유다는 자신들의 중요성과 신성한 운명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발전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땅을 통치해야 한다는 이해를 유다 백성과 흩어진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강력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 창세기 이야기는 유다를 중심으로 하지만, 북이스라엘 전통도 존중합니다. 아브라함이 북왕국의 중요한 중심지인 세겜과 벧엘, 그리고 유다의 중요한 중심지인 헤브론에 제단을 쌓는다는 점은 아브라함이 남북 전통을 잇는 통일자의 역할을 함을 보여줍니다.
.. 결론적으로 족장 전통은 유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스라엘의 '경건한 선사시대'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이는 민족의 초기 역사를 설명하고, 민족 경계를 설정하며, 남북 전통을 포괄하고, 결국 유다의 우월성을 강조합니다.
(3) 페르시아 시대의 최종 편집
- 창세기 편집은 기원전 7세기에 끝나지 않고, 페르시아 시대(적어도 기원전 5세기까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 오경의 제사장(P) 문헌은 주로 포로기 이후의 것으로,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에서 제사장들의 부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경의 최종 편집은 이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 포로기 이후의 필자들은 예루살렘의 공동체를 성전을 중심으로 재결합하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며, 이웃 집단과의 관계 문제, 공동체 내 국내 문제 등을 다룰 필요가 있었습니다.
- 이러한 필요성은 후기 군주 시대 유다 국가의 필요성과 유사했습니다. 두 시대 모두 영토가 제한적이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한 중심지로서 큰 중요성을 느끼고, 적대적인 이웃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며, 외지인 및 내부의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 따라서 후기 군주 시대 유다의 이념 상당 부분이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백성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 헤브론의 족장 무덤 전승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포로기 이후 유다의 남쪽 경계가 벳술과 헤브론 사이에 있었기에, 헤브론이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았음에 대한 상실감을 족장 무덤 전승을 통해 남쪽 언덕 지역에 대한 강한 애착을 고정하려 했을 것입니다.
- 또한 창세기의 후기 편집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이 문명 세계의 심장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고향이 "갈대아 우르"라는 언급은 유대인들에게 명성 높은 고대 문화적 혈통을 제공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이야기에 대한 접근 방식도 족장 이야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1) 기원전 13세기 사건을 찾기 위한 시도와 실패
- 파라오 람세스 2세 시대(기원전 13세기)에 사건을 위치시키려는 시도는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 이집트 기록에 출애굽 사건 언급 없습니다. 신왕국 시대의 어떤 이집트 문헌에도 이러한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 이집트에서 초기 히브리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시나이 북부 해안은 강력한 이집트 요새로 보호되어 있어 탈출하는 사람들이 사막을 건너는 것을 쉽게 막을 수 있었습니다.
- 후기 청동기 시대 유적 부재:
시나이 반도 나머지 지역, 특히 이스라엘인들이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알려진 가데스 바네아와 같은 곳에서도 늦은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가나안의 이집트 통치:
당시 가나안은 이집트 속주였으며, 아마르나 서신에 따르면 50명의 이집트 병사만으로도 지역을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2) 후기 시대의 반영
- 출애굽 이야기와 사막 방랑에 언급된 많은 지명에 해당하는 곳에서는 기원전 8세기 또는 7세기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 이집트학자 도널드 레드포드는 출애굽의 지리적 배경과 이야기 속 인명들이 이집트 역사상 사이스 시대(기원전 7~6세기), 즉 성서 텍스트가 편집된 시기와 가장 잘 맞는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습니다.
- 이는 출애굽 이야기가 수세기 전의 위대한 사건에 대한 고대 기억(예: 기원전 16세기에 나일 삼각주에서 케나이트 인구가 추방된 사건)을 보존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3) 이념적 목적
-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 위대한 파라오가 굴욕 당하고 패배했다는 오래된 이야기가 후기 군주 시대 유다 사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특히 기원전 7세기 후반 아시리아가 레반트에서 철수하면서, 요시야 왕의 주도하에 잃어버린 북왕국 영토를 재정복 하려는 유다의 꿈과 이집트의 옛 제국 부활 계획이 충돌하던 시기에 이러한 이야기가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을 수 있습니다.
- 출애굽 이야기는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 시대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서학자 데이비드 클라인의 말처럼, "이집트에서의 속박은 바벨론에서의 그들 자신의 속박이며, 지나간 출애굽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출애굽이 된다"고 표현됩니다.
- 바벨론에서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은 출애굽 이야기에서 자신들의 고난을 발견했습니다. 성서학자 Y. 호프만에 따르면, 두 이야기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외국에서 고향을 떠나, 힘든 망명 기간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고, 도중에 위험한 사막을 건너야 했으며, 현지인과의 갈등을 겪었고, 지도자들이 동화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초기 발굴 결과와 정복 이야기
- 기원전 192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진행된 일련의 발굴들은 성서의 가나안 정복 서술을 지지하는 자료를 드러낸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 많은 유적지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의 도시들이 대규모 화재로 파괴되었고, 이 파괴가 기원전 13세기 후반으로 비정되었으며, 침략하는 이스라엘인들과 연관되었습니다.
- 알브라이트와 야딘이 제시한 이러한 패러다임은 독일 성서학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2) 군사적 정복 이론의 종말
- 1960년대와 1980년대 사이의 고고학 및 인류학 연구 발전은 군사적 정복 이론의 총체적인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 핵심 유적지 발굴 결과:
여리고, 아이(Ai), 아랏(Arad)과 같은 정복 서술에 언급된 주요 유적지 발굴 결과, 이곳들이 후기 청동기 시대에 사람이 살지 않았거나 중요하지 않은 마을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 도시 국가 시스템의 붕괴 과정:
라기스와 하초르의 새로운 발굴 및 메기도(Megiddo)의 재평가는 후기 청동기 시대 가나안 도시 국가 시스템의 붕괴가 수십 년에 걸친 긴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며, 단일 장군과 단일 군대에 의한 통일된 정복 이론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 이집트의 가나안 지배:
기원전 12세기 후반까지 가나안에 대한 이집트의 강력한 지배력이 유지되었음이 밝혀져, 오합지졸의 군대가 가나안을 침략하는 것을 쉽게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지역적 현상이 아님:
후기 청동기 가나안의 붕괴는 동부 지중해 전역을 포함하는 더 넓은 현상의 일부였습니다. (혹시, 해양민족의 침략?: 편역자 주)
- 이스라엘의 부상:
1980년대 중앙 언덕 지역에서 수행된 대규모 조사는 고대 이스라엘의 부상이 현지 인구의 정착화 및 농업화라는 장기적 순환 과정의 한 단계였음을 시사했습니다.
(3) 후기 군주 시대 현실의 반영
- 정복 이야기가 후기 군주 시대의 필자들에 의해 완전히 "창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신명기 역사가들은 오래된 민담과 파편화된 기억들을 가져와 자신의 편집물에 통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복 서술의 전반적인 윤곽은 후기 군주 시대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 이념적 중심:
신명기적 사고의 핵심은 모든 이스라엘 영토와 백성이 다윗 계열의 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며, 모든 이스라엘 종교의식은 예루살렘 성전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이념은 북왕국 멸망 이후에 나타났지만, 아시리아가 이 지역을 지배하는 동안에는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인들이 기원전 630년경 철수하자,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습니다.
- 땅 소유가 중요한 관심사였던 시기에 여호수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글자 그대로 따랐을 때 어떤 승리도 거부될 수 없다는 분명한 교훈을 담은 잊을 수 없는 서사시를 제공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원전 7세기라는 매우 익숙한 배경을 바탕으로, 신명기 이념에 가장 중요한 장소들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 여호수아는 요시야 왕의 비유적 초상화:
리처드 넬슨은 여호수아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가 될 요시야 왕의 비유적 초상화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과거의 신화적 가나안 정복은 현재의 싸움을 위한 전투 계획인 셈입니다.
- 전투 장소의 의미:
여리고와 아이(벧엘 지역)에서의 첫 두 전투는 아시리아 철수 후 요시야 왕의 확장주의의 첫 목표 지역이었습니다.
- 기브온인 이야기:
"먼 나라에서 온" 기브온인들이 침략하는 이스라엘인들과 언약을 맺는 이야기는 기원전 7세기의 역사적 현실에 근거합니다. 유다가 북쪽 벧엘 지역으로 확장하면서, 아시리아인들이 수십 년 전에 데려와 정착시킨 피추방자들의 후손들을 어떻게 통합할지가 문제였습니다. 기브온인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는 신명기 역사가가 이들이 비록 이스라엘 혈통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통합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역사적 맥락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 세펠라 정복:
이 이야기는 후기 군주 시대 유적의 분포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유다의 이 중요한 비옥한 지역으로의 재확장을 상징할 것입니다. 이 지역은 아시리아 왕 산헤립에 의해 유다로부터 빼앗겨 해안 평야의 도시에 주어졌으나, 기원전 7세기경에 유다 영토로 재편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 북쪽 지역 정복 (하초르, 갈릴리):
마지막으로 성서 이야기는 북쪽으로 향하며, 이번에는 과거의 정복이 미래의 이상적인 정복이 됩니다. 하초르 언급은 가나안 도시 국가 중 가장 중요했던 과거의 명성뿐만 아니라, 최근에 북이스라엘 왕국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다는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북쪽 전쟁과 관련된 묘사된 영토는 패배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갈릴리 영토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이 지역들은 기원전 7세기 유다에서 예루살렘의 다윗 왕들에게 법적으로나 신성하게 속한다고 여겨지던 영토였습니다.
요약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역사를 서술하는 족장, 출애굽, 정복 이야기들은 그대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오래된 기억, 민담, 신화, 신학적 일화들을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묘사된 방식은 후기 군주 시대의 현실로, 그리고 족장 및 출애굽 이야기의 경우 포로기 이후의 현실로 '싸여(포장되어, 은유되어, 재구성되어, 각색되어 등등)' 있습니다. 더욱이, 이 이야기들이 편집된 방식은 저자들의 이념적 목표에 부합했음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들을 초기부터 후기까지 순차적으로 읽기보다는, 이야기가 기록된 시점의 관점에서 후기부터 초기까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자료는 NotebookLM의 도움을 받아 quick 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내용 정리에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리된 text는 참조만 하시기 바라며, 원본 영상을 통해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