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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ble Unearthed》(발굴된 성경)

“고대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찾기 / 학습을 위한 요약

by KEN

발굴된 성경(The Bible Unearthed)


Source: https://youtu.be/5go6HUc-Bgw?si=b0xMyg8FSvSIzIDH

제공된 자료는 고고학적 발견과 역사적 맥락을 통해 구약성경의 기원을 탐구합니다. 이 영상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기초 텍스트인 구약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출애굽(이집트 탈출), 가나안 정복 이야기의 실제 발생 시기를 조사하며, 다윗과 솔로몬의 거대한 왕국에 대한 성경적 묘사를 재평가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출처는 성경 본문이 기원적으로 정치적 의도에 의해 주도되었고, 유다 왕국의 필요와 열망을 반영하여 7세기경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는 성전 파괴와 바빌론 유배 이후 유대인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성경이 수행한 중요한 역할을 강조합니다.

소위 '최소주의자'의 관점에서 정리된 내용임을 감안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과 성경: 고고학적 재해석


본 정리 자료는 다큐멘터리 <The Bible Unearthed>는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및 닐 실버만의 연구를 바탕으로, 구약성경의 주요 이야기들—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서, 사무엘서 등—에 대한 최신 고고학적 해석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성과 유대교의 기원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하며, 성경이 기원전 7세기 유다 왕국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반영해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고고학의 진화와 성경 연구에 미친 영향

19세기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고고학자들은 "한 손에는 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팔레스타인을 탐험하며 성경 텍스트의 역사적 진실성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와 같은 학자들이 이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고고학은 독립적인 과학 분야로 변모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건축 유적, 도자기, 잔해 등을 과학적으로 샘플링하고 해석하여 (당시) 인간의 현실을 재구성합니다.

- “이 전문가들은 건축 유적, 도자기, 온갖 종류의 잔해들을 거대한 살아있는 그림의 요소들로 간주한다.”


텔 므깃도(Megiddo):

텔 아비브 대학의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이 발굴을 주도한 므깃도는 "성경 고고학의 보석"이자 "비할 데 없는 유적지"로, 7천 년 이상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그 25개 층은 당시 그 지역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창을 제공합니다. 므깃도에서 발견된 증거들은 성경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연대기를 제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2. 족장 이야기(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재해석


전통적 연대기와의 불일치:

전통적으로 족장들은 기원전 1800년경(중기 청동기 시대)에 살았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므깃도의 중기 청동기 시대 지층은 아브라함의 유목 생활과 상반되는, 약 2,000명의 주민이 사는 번성한 도시 국가를 보여줍니다. 가나안은 당시 경제적으로 발달한 도시 국가들의 밀집된 네트워크를 가진 지역이었습니다.

- “그때 므깃도는 기념비적인 건물, 요새, 사원들을 갖춘 중요한 행정, 문화, 경제 중심지였다.”


메소포타미아와의 연계성:

아브라함의 메소포타미아(하란) 기원설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불충분합니다. 마리(Mari)와 누지(Nuzi)에서 발견된 설형 문자 점토판은 아브라함과 유사한 이름을 포함하지만, 그 이름이 기원전 1800년경에만 특정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후 수세기 동안 널리 사용되었음이 밝혀져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 증거:

- 블레셋인: 창세기에 블레셋인이 언급되지만, 고고학적으로 블레셋인은 기원전 12세기(약 1200년 또는 1150년)에야 처음 등장합니다.

- 낙타: 창세기에는 낙타에 대한 25개의 언급이 있지만,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낙타는 기원전 1000년 이전에는 짐을 나르는 동물로 가축화되지 않았습니다. 아라비아에서 레반트 해안으로 이어지는 낙타 카라반 무역은 기원전 7세기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는 요셉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카라반 무역이 실제로는 기원전 7세기의 현실을 반영함을 시사합니다.


족장 이야기의 기원과 목적:

이스라엘 핑컬스타인과 닐 실버만은 족장 이야기가 기원전 7세기 유다 왕국에서 처음 쓰여졌다는 가설을 제시합니다.

- 지리적 분리:

마틴 노스(Martin Noth)의 연구에 따르면, 아브라함(헤브론), 이삭(가나안 남부), 야곱(가나안 북부)의 이야기는 원래 서로 다른 지리적 지역과 관련된 독립적인 구전 전통이었습니다. 이들은 후대에 성경을 집필한 사람들에 의해 하나의 가족으로 엮어졌습니다.


- 유다 왕국의 중심성 강조:

족장 이야기는 유다 왕국의 관점에서 쓰여졌으며, 아브라함을 가족의 창시자이자 이야기의 중심으로 놓음으로써 유다를 "우주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 국가 형성의 상징: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국가의 탄생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가족사로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3. 출애굽기 이야기의 재해석


이집트 기록의 부재:

이집트는 행정 기록이 매우 발달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고위직이나 이스라엘인의 노예 생활, 대규모 출애굽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메르넵타 비석(Merneptah Stele)의 중요성:

기원전 1207년 파라오 메르넵타의 비석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을 언급하는 유일한 이집트 문서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미 가나안에 정착해 있었고, 도시가 아닌 반유목민 공동체였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출애굽이 이 시기 이전에 일어났을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출애굽 경로의 불가능성:

성경에 묘사된 북쪽 경로는 이집트 요새와 군사 주둔지로 인해 수십만 명의 인구가 지나갈 수 없었을 것이며, 남쪽 아라드 오아시스에서도 긴 체류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60만 명의 성인 남성(총 2백만 명)이 이집트를 떠났다면 당시 이집트 인구(350만 명)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고, 이는 이집트 사회에 막대한 경제적/사회적 혼란을 초래했을 것이나, 이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의 기원과 목적:

족장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출애굽기 이야기 또한 기원전 7세기 유다 왕국에서 쓰여졌습니다.

- 지리적 단서: 출애굽기에 언급된 "피톰"과 "피라오"와 같은 지명들은 기원전 7세기 경에 니코 2세 파라오에 의해 건설된 도시들을 가리킵니다.


정치적 목적:

유다 왕국은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이후 남은 유일한 이스라엘 국가가 되었고, 아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의 완충지대였습니다. 기원전 7세기 요시야 왕은 아시리아의 쇠퇴를 틈타 북이스라엘 영토를 재정복 하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졌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는 약소 민족이 강력한 제국(이집트)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요시야를 "해방자이자 율법 제정자"인 모세에 비유하여 그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 “출애굽 이야기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을 넘어선 해방의 이야기이다.”

- 출애굽을 통한 해방 이후 율법을 수여받는다는 이야기는 율법이 유대교의 핵심이자 백성과 신을 묶는 "언약"의 토대가 됨을 강조합니다.


4. 가나안 정복과 통일 왕국(다윗과 솔로몬)의 재해석

여호수아의 정복 이야기:

성경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급습하여 멸종에 가까운 대량 학살과 함께 정복했다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이를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 여리고(Jericho)의 경우: 예리코는 성경이 제시하는 정복 시기인 기원전 13세기 후반에 "점령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 파괴 시기의 불일치: 성경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정복을 이야기하지만, 여러 가나안 도시들(하솔, 라키스, 벧엘, 므깃도)의 파괴는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집트의 통치:

기원전 15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가나안은 이집트의 속주였으며, 이집트의 강력한 요새(벧산 등)가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대규모 이스라엘 군대가 이집트의 감시망을 피해 가나안을 침공하여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고고학적 조사(특히 고지대 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외부의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기원전 12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가나안 고지대에서 일어난 "사회적 변혁"의 결과로 등장했습니다.


유목민의 정착:

후기 청동기 시대 후반의 지역적 위기(제국들의 붕괴, 도시 파괴, 기근)는 기존의 정착민-유목민 교환 시스템을 붕괴시켰고, 이로 인해 유목민들이 고지대에 정착하여 약 250개의 작은 마을을 형성했습니다.

- 식단 차이: 이 초기 이스라엘인들은 이웃 민족들과 달리 돼지고기를 섭취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 이는 돼지고기를 섭취하는 블레셋인과의 구별 수단이었을 수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 재평가:

다윗의 실존: 텔 단(Tell Dan)에서 발견된 비문은 "다윗의 집"을 언급하며 다윗 왕의 역사성을 강력하게 증명합니다.

- 왕국의 규모: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예루살렘, 므깃도)에 따르면, 다윗의 예루살렘은 성경에 묘사된 거대한 제국의 수도가 아닌 "작은 산악 마을"(3-4 헥타르)에 불과했습니다. 솔로몬의 수도 또한 "보잘것없는 마을"이었습니다.


솔로몬 건축물의 연대:

므깃도, 하솔, 게셀에서 발견된 솔로몬의 건축물(6개의 방이 있는 성문 등)로 여겨졌던 유적들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솔로몬 시대(기원전 10세기)보다 약 한 세기 후인 기원전 9세기, 즉 북이스라엘 왕국 옴리 왕조 시대로 밝혀졌습니다.

- “므깃도에 있는 기념비적인 건물들은 사실 솔로몬 시대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후에 지어졌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위대성:

고고학적 증거는 북이스라엘 왕국(사마리아, 므깃도)이 남유다 왕국보다 훨씬 부유하고 강력하며 국제적으로 연결된 왕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이 북이스라엘 왕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남유다(예루살렘)의 관점에서 역사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의 정복 꿈과 성경의 역할:

기원전 7세기, 남유다 왕 요시야는 아시리아 제국의 쇠퇴를 기회 삼아 북이스라엘 영토를 정복하여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정복 이야기와 다윗-솔로몬의 대제국 이야기는 이러한 요시야의 정치적 목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 “여호수아의 정복은 사실 요시야가 이루고 싶었던 정복이다.”

- “요시야 왕의 이야기가 성경에 상당히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야기꾼은 그를 새로운 다윗으로 제시하고 싶어 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유대교의 기원과 성경의 형성

요시야의 종교 개혁:

요시야는 통일 왕국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종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 율법서의 발견: 성전에서 율법서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유일신 신앙과 예루살렘 중심의 예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신명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종교의 중앙집권화:

이 개혁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한 하나님만을 한 곳에서 경배해야 한다”는 사상을 강조하며,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합법적인 예배 장소임을 확립했습니다. 이는 국가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문해력의 확산:

기원전 7세기부터 유다 사회에서 문해력이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기록된 텍스트가 권위를 갖게 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 “기원전 7세기부터 글쓰기가 이스라엘 사회의 모든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텍스트가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요시야 시대의 종교 개혁 때이다.”


바벨론 유수와 정체성 재구성:

기원전 597년과 586년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와 유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성전도, 왕도, 나라도 없어진 상황에서, 유배된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정체성을 재구성할 다른 수단”을 찾아야 했습니다.

- “템플(성전)도 없고, 왕도 없고, 나라도 없고, 영토적 통일성도 없었다.”

- “유배된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그 정체성을 구축했다.”


유대교의 발명:

요시야의 개혁과 이전의 전통들을 통합하고 확장하는 과정을 통해, 유배지에서 “유대교는 발명되었다.” 율법(토라)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동 가능한 국가"로 만들었고, 이는 시나고그와 율법의 연구를 통해 계승되었습니다. 에스라 서기관이 토라의 최종 형태를 완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경의 목적:

성경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혈통의 발명, 율법의 확립, 메시아적 약속의 확언"이라는 정치적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교의 세 가지 기둥(공동의 뿌리, 율법, 메시아적 희망)의 토대가 됩니다.

- “성경 텍스트가 기록될 때 걸려 있던 것은 혈통의 발명, 율법의 확립, 그리고 메시아적 약속의 확언이었다.”




고고학은 성경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 그 이야기들이 쓰여진 정치적,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유랑, 출애굽, 가나안 정복,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 이야기들은 기원전 7세기 남유다 왕국, 특히 요시야 왕의 통치 시기에 강성했던 북이스라엘 왕국의 유산을 통합하고, 유일신 신앙을 강화하며, 통일된 국가를 꿈꾸던 정치적 열망 속에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성경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기 위한 강력한 서사적 도구였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유대교의 기초가 되었으며, 나아가 서구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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