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먼지보다 작은 존재가 나를 힘들게 할 때
부모님의 창업 이전에,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님이 창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던 그 시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점심 먹으러 다 같이 백반집에 갔었다. 나는 수많은 접시 중 멸치볶음이 담긴 한 접시로 젓가락을 뻗어 개중에 한 마리를 집어내 엄마에게 보여줬다.
“인생사는 멸치볶음과 같지.”
“또 뭔 소리고. 와?”
“이 멸치 한 마리, 한 마리, 모두 개성 있고 자기가 소중한 생명이었을 건데, 사람이 반찬으로 먹을 때는 이렇게 수백 마리를 아무 생각 없이 먹잖아. 인간도 결국 똑같아.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점점 떠오르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한 점이지.”
요뜨에게는 그저 간식 한 조각이 되는 멸치…
“푸- 별 생각을 다 한다.”
“어때? 딱 맞아떨어지는 비유 아니야?”
“몰라~”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인 관점을 조화롭게 활용해야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어떤 문제는 사실 우주 먼지보다 작은 존재일 뿐인데, 사람 심리가 열 개 중에 부정적인 것 하나만 있어도 내 시야를 압도하더라. 가끔 심리적인 문제로 괴로울 때, 물리적으로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숨통이 트였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부모가 바쁜 삶 속에서도 명품 장인보다 정교하게 빚어낸 작품이다. 아무리 잘 빚어놓은 입체 도형이라도, 보는 이가 어느 한 구석에 자리한 모난 부분만 바라보면 아름다운 작품 전체가 모함당하는 것이다. 보는 이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지 창작자를 모함할 수 있는 권한은 언제나 없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전체적으로 바라봐주고 인정해 주는 이에게 가야 한다. (그게 일로 엮이면 힘들어서 문제지만…)
모든 이들이 하나의 작품이라 생각하고 존중하고, 나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한 존재는 ‘결국 우주 먼지보다 작은 존재일 뿐이다…’라고 되뇌는 것이 인격체의 도리.
그냥 길 가다 흔하게 보이는 고양이 같이 생긴 초바와 요뜨도 태어났을 적에 신입이가 이틀 동안 잠도 못 자면서 빚어낸 작품이다.
언제 이렇게 뚱뚱해졌는지 장성한 초바
엄마가 냉장고 문만 열면 달려와서 멸치 달라고 시위하는 요뜨
새끼를 저만큼 기른 어미지만 언니 집사 앞에서는 아기가 되는 신입이
이처럼 모든 생명체는 삶의 이유에 옳고 그름 없이 개성 넘치는 작품이니, 부디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길…
마지막으로 요뜨가 멸치처럼 보이는 집사의 고민을 속 시원하게 먹어 치워 준다더라.(원래 엄마 안주였던 멸치를 계속 뺏어먹길래 건강이 걱정되어 고양이 간식용 저염 멸치를 사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