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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린 Nov 08. 2022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온 이를 이해한다는 것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로 읽는 조부모님의 삶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면서 다양한 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니, 평소 같으면 그저 지나쳤을 책들도 몇 장이라도 읽어보게 되면서 독서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되었음을 실감한다. 최근에 읽게 된 책은 학창 시절에 읽었던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다. 청소년 필독서 중 하나여서 그냥 읽었던 것 같은데, 책을 다시 펴 보니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처음 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읽어야 해서 그저 읽었던 책이니만큼 아무런 인상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읽게 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를 읽으며 가장 크게 와닿은 것은 박완서 작가가 나의 조부모님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동세대라는 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겪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으니, 게다가 험난한 전쟁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중산층의 삶을 살았던 박완서 작가와는 달리 어려우면 더 어려웠지, 딱히 나은 처지는 아니셨을 것이라 생각하니 큰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할머니 할아버지, 특히 친가 쪽의 친조부모님은 예쁜 말을 할 줄 모르시고, 두 분께서 항상 서로 무시하며 다투시고, 특히 할아버지께서는 약주를 하시면 추태를 부리시는 일이 잦아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분들에 대한 애정을 많이 느끼지 않고 자라왔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그 당시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남녀가 서로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연애감정을 쌓아가며 한쌍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이었을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집에서 더 이상 챙겨줄 수가 없어 식솔을 줄이고자 시집을 보내고, 또 시집간 집에서는 귀한 며느리가 아닌 공짜로 부려먹는 노동력이자 애 낳는 기계로 닳을 때까지 쓰이는 게 낯설지 않은 시절이었다. 


할머니께서는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고 미운 말만 하는 남편과 애정 없는 수십 년의 결혼생활로 아들 셋을 낳으셨고 큰 아들의 자식들까지 키우시며 노동력만 갈아 넣는 70년을 보내셨고, 꿈도 욕심도 많으셨던 할아버지는 가족을 건사하느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 성취하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그 좌절감을 만만한 아내에게 쏟아내시며 한평생을 살아오셨다. 그리고 그 원망과 좌절이 켜켜이 쌓이고 넘쳐 그 주변으로도 흘러나가 여기저기 고여버린 지금, 친조부모님께서는 같은 집에서 함께 사는 큰아들 내외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함께임에도 고독한 말년을 보내고 계신다.  


그와 대비되게, 살가운 말을 하고 예쁨을 많이 주셔서 내가 더 애정 하는 외가 쪽 조부모님들은 상대적으로 넉넉한 환경과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살아오셨다. 사랑을 받으셨기에 내리사랑을 주실 여유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유가 있어 사랑을 주시고, 사랑을 주셔서 더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신다는 이 사실 역시 어찌 보면 잔인한 수저의 대물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세대 차이와 세대 간 갈등이 큰 편이다. 워낙 짧은 시장에 고도의 성장을 이뤄 세대 간의 경험과 삶의 방식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세대의 교육 방식으로 주입되고 만들어진 나의 생각들로는 다른 세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의 방식을, 생각을 틀렸다고 단정 짓기 전에 동세대의 작가가 쓴 책을 먼저 하나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친조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없던 애정이 솟아오르지는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연민을 느낀다. 


이 연민의 감정도, 어떻게 보면 애정의 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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