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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Apr 26. 2024

E6. 갈릴리 산지

 갈릴리(Galilee) 산지는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있다. ‘갈릴리’는 ‘굴러가다’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둥근 모양의 ‘원’이나 ‘고리’ 등을 지칭한다. 신약시대 갈릴리는 갈릴리 산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지칭하는 고유한 명칭이었다. 갈릴리 산지는 지형적 차이에 의해 상부와 하부로 나뉜다. 상부 갈릴리는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산지이고 하부 갈릴리는 600m 이하의 낮은 산지이다. 보통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갈릴리는 하부 갈릴리를 의미한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느보산에서 모세가 죽은 후 협곡을 내려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후에 그 땅을 열두 지파에게 분배하였다.

     

 갈릴리 산지는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가, 그 아래 남쪽의 사마리아 산지는 에브라임, 므낫세 반 지파와 단 지파가, 더 남쪽의 유다 산지는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가 받았다. 지금의 요르단 지역인 바산(골란 고원)은 므낫세 반 지파가, 길르앗 지방은 갓 지파가, 그리고 사해 동편에 있는 광야는 르우벤 지파가 기업으로 받았다. 갈릴리와 요르단 지역은 사방으로 '열린 지역'으로 외부와 접촉이 쉽다. 요르단 지역을 기업으로 얻은 므낫세 반 지파,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주변국에 제일 먼저 흡수되었다. 이들 세 지파는 목축에 적합한 지역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스라엘 왕국의 남북 분열 이후에 주변 민족과 혼합되었다. 갈릴리 지역은 북방 이스라엘이 공격당할 때 제일 먼저 침략을 받았다. 그리고 외부와 쉽게 교류하고 혼합되며 영적으로 타락했다. 이 지역은 페니키아 해상 제국과 쉽게 교류했다. 갈릴리가 위치한 북쪽과 지중해 해안이 있는 서쪽이 개방된 지역이다. 이에 반해 그 아래에 있는 사마리아 산지는 비교적 덜 개방된 지역으로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다. 사마리아 산지 동편은 천연요새 같은 요르단 계곡이 지나간다. 남쪽은 유다 산지와 접한다. 팔레스타인에서 남북 사이 다툼은 주로 이 지역에서 벌어진다.

     

 갈릴리 지역을 분배받았던 네 지파는 다른 지파에 비하여 힘이 약해서 가나안에 있던 사람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채 그들 사이에서 공존해 살았다.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갈릴리 지역은 솔로몬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그 뒤 BC 732년 앗수르의 점령 이후 앗수르 행정 구역이 되었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갈릴리는 유대인들의 자치 지역에 소속되지 못한 변방 지역으로 남이 있었다. 당시 갈릴리는 행정적으로 사마리아 지방에 편입되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점령 이후, 이 지역에 헬라인들과 뵈니게인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비록 작은 규모이긴 해도 유대인 공동체가 이곳에 존재하였다. 마카비 혁명운동이 일어나면서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들은 주변 이방인의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고 혁명의 지도자들은 이곳의 유대인들을 남쪽 유다 지방의 안전지대로 이주시켰다. 그 후 BC 104년경에 하스모니안 왕조가 갈릴리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유대인들은 다시 갈릴리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정통성을 강조하는 유다 지방의 유대인들은 변방의 갈릴리 지방 사람들을 멸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로마가 팔레스타인 전체를 통치하게 된 뒤로는 로마의 후원을 받아 분봉왕이 된 헤롯왕은 자연스럽게 갈릴리 지역을 자신의 확고한 영토로 삼았다.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헤롯왕이 죽고 난 뒤에 이집트에서 돌아와 갈릴리 산지의 나사렛(Nazareth)에 정착하였다. 예수는 이 지역에서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 대부분을 보냈다. 나사렛 산지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산지로서 길이는 약 12km이고 폭은 약 3km이다. 산지 밑의 계곡에는 비옥한 토양이 있고, 이 산지 위에서는 전망이 좋아 이스르엘 계곡 평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스르엘 계곡 평원 가까운 곳에 가파른 절벽형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누가복음 4장 28절 근처에 보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이곳으로 끌고 와서 산 아래로 떠밀어 죽이려 했다고 전해진다. 신약시대에 나사렛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매력적인 도시는 아니었다. 이는 요한복음 1장 46절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한 말에서도 나타난다. 나다나엘의 이 말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발언이 아니라 메시아와 관련되어 어떠한 언급도 성경에 없었던 동네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사렛은 바벨론 유수 이후에 건설된 시골 동네였다고 추정된다.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나사렛 기념교회가 세워지고, 최근인 1955년에 현재의 성수태고지교회(Annunciation Church)가 개축되었다.


 나사렛에서 북서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치포리는 넓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히브리어로 치포리는 ‘새’를 의미하는데, 마치 새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이 지역에서 주변 지역을 조감할 수 있다고 한다. 헬라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치포리는 BC 64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이후 그 중요성이 크게 대두되었다. 로마는 치포리를 갈릴리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삼았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이 대거 갈릴리 지역으로 이주해 오면서 치포리는 유대인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그 뒤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치포리는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으며 큰 규모의 교회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가나(Cana)는 예수의 첫 기적으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성경의 이야기가 요한복음 2장 1~11절에 전해지는 곳이다. 신약시대 가나의 정확한 위치로 두 군데가 주장되고 있다. 한 곳은 교회 전승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6km 떨어진 케파르 카나(Kefar Kanna)이다. 이 도시에 있는 희랍정교회는 돌로 된 두 개의 항아리를 보관하고 있다. 예수가 이적을 보였던 여섯 개의 돌항아리 중 두 개가 남은 것들이라고 한다. 신약시대 가나의 또 다른 위치는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키르벳 카나(Kirbet Kanna)이다. 이곳은 현지 주민들에 의하여 오늘날까지도 ‘갈릴리 가나’라고 불린다고 한다. 가나에서는 포도주의 이적 이외에 두 번째 표적으로 요한복음 4장 46~54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왕의 병든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기도 하였다. 가나는 또한 요한복음 21장 2절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 중 하나인 바돌로메(Bartholomew) 즉 나다나엘(Nathanael)의 고향이었다.

     

 이스르엘(Jezreel) 계곡 평원은 하부 갈릴리 산지와 사마리아 산지 사이에 위치하면서 지중해와 요단 계곡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역이다. 이스르엘은 ‘하나님의 식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이 지역을 ‘이스라엘의 빵 바구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스르엘 계곡 평원은 크게 동부와 서부로 나뉜다. 동부 지역은 벧산(Beth Shan)과 이스르엘 도시 사이의 지역으로 동서 간의 길이는 18km이며 길보아산과 모래산 사이의 남북 간의 폭은 약 5km이다. 이곳의 중심부로 하롯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은 길보아산에서 발원하여 요단 계곡 쪽으로 흐른다, 하롯강은 연중 지속적으로 이 지역에 물 공급을 가능하게 해 주어 이 지역의 비옥한 토양과 함께 이 지역을 중요한 곡물 생산지가 되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전쟁들이 벌어졌던 곳이다. 길보아산에서 사울이 블레셋을 맞아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스르엘 계곡 평원의 서부지역은 외형상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삼각형의 밑변에 해당하는 지역은 북쪽에 있는 나사렛 산지이다. 때로는 이곳을 ‘므깃도 골짜기’라고 하는데, 서부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므깃도(Megiddo)이기 때문이다. 므깃도는 가나안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고대도시로서 전략적 도시였다. 많은 전쟁이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BC 15세기의 이집트의 기록에도 투트모세 3세가 가나안 군대를 패배시켰다고 나온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므깃도는 강력한 도시국가로 처음부터 므깃도를 점령하지 못하였다. 다윗 시대에 이르러 므깃도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고 솔로몬은 이곳에 요새화된 자신의 병거성을 건설하였다. 므깃도는 BC 733년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였고, 그 후 요시아왕은 BC 609년 이곳에서 이집트와 싸우던 중에 전사하였다. 성경 시대 이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Napoleon)이 1799년 터키군과 이곳에서 전쟁을 벌였고 세계 1차 대전 중에 영국의 알렌비(Allenby) 장군의 연합군은 이곳에서 터키군을 패배시켰다. 요한계시록 16장 16절에서는 마지막 세계 종말에 있을 아마겟돈(Armageddon) 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진다고 예언하였다. 아마겟돈은 ‘므깃도의 언덕’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 표기한 말이다.

     

 갈멜(Carmel) 산은 중앙산지에서 지중해 쪽으로 약 24km 뻗어 나와 현대도시 하이파(Haifa)에서 지중해와 만나고 있다. 갈멜산은 가장 높은 곳이 해발 552m에 불과한 낮은 지형의 산지이다. 갈멜은 ‘하나님의 포도원’이라는 뜻으로 지중해로부터 불어오는 습도 높은 서풍으로 인하여 강우량이 많고 비옥한 지역이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Elijah)는 갈멜산에서 850여 명의 이방 선지자들과 신앙대결을 벌여 이긴 기록이 나온다. 갈멜산에서는 선사시대에 인류가 살았었던 흔적도 발견되었다. 미국의 서부 개척자들은 태평양 연안의 몬터레이(Monterey) 근처에 비슷한 지역을 카멜(Carmel)이라고 명명하고 도시를 육성하였는데 1980년대에 서부 영화배우 출신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on ‘Clint’ Eastwood, Jr. 1930~)를 시장으로 선출한 바가 있다.

     

 고대도시 벧산(Beth Shan)은 하롯 계곡과 요단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이곳은 요단 계곡을 지나가는 남북 교통로와 이스르엘과 요단 동편을 지나가는 동서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벧산은 BC 15 세기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 시대의 역사자료에 이미 언급되어 있다. 벧산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에 점령하지 못한 도시였다. 사울 시대에 이 도시는 블레셋의 통치 아래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달아매었다고 한다. 다윗은 자신의 왕국을 북쪽으로 확산하면서 이 도시를 점령했고, 솔로몬은 벧산을 자신의 다섯 번째 행정 구역에 포함시켰다. 로마가 이 도시를 점령한 이후 형성된 데가볼리(Decapolis) 도시 중에서 요단강 서편에 있는 유일한 도시였음에도 데가볼리 도시연맹의 중심적 수도가 되었다. 벧산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유물로는 보존 상태가 양호한 로마 시대의 대규모 원형극장이 있다.

     

 다볼(Tavor) 산은 나사렛 산지의 북쪽 지역으로 이스르엘 계곡의 북동쪽에 있다. 이 산은 아담한 봉우리의 산으로 주변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다볼은 ‘배꼽’ 혹은 ‘중심’이라는 의미인데 이로 보아 고대부터 이곳이 예배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한다. 다볼산은 이스라엘의 성산의 하나로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산은 기독교의 전통에서도 신성시되는 장소이다. 예수께서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 자신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시킨 장소가 곧 다볼산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전승에 근거하여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다볼산 정상에 변화산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다볼산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는 모래(Hamore) 산은 화산활동에 의하여 형성된 산이다. 이스르엘과 하롯 계곡 사이의 도로와 티베리아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모레산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모래산의 북쪽과 남쪽 기슭에는 성경과 관련되는 중요한 두 도시가 있다. 남쪽 기슭에는 구약 시대의 도시인 수넴(Shunem)이 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 마지막 결전을 위하여 이곳에 진을 쳤다, 나이가 많아 늙은 다윗을 위하여 채용된 수넴 여인 아비삭은 이곳 출신이었다. 이곳에서 한 수넴 여인은 엘리샤(Elisha)를 극진히 대접하였고 엘리샤는 그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모래산의 북쪽 기슭에는 신약시대의 도시인 나인(Nain)이 있다. 예수는 이곳에서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준 장소로 유명하다. 현재도 ‘나임’이라는 아랍 동네가 있으며 동네 한가운데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갈멜산에서 욥바(Jappa) 근처까지 약 80km 길이의 해안 평야 지역이 샤론 평야이다. 이 지역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붉은 색깔의 모래로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이 지역은 거대한 습지대였다. 샤론의 어원적 의미는 숲이 우거진 지역이지만 그것은 습지대에 형성된 잡목 숲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지대에서는 농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도로도 평야의 중심 지역이 아닌 산지 쪽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샤론 평야의 울창한 잡목 숲은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였던 터키가 기차 연료를 충당하기 위하여 대부분 벌목되었다. 1920년대 시온주의자들은 이 지역을 대대적으로 매입하여 유대인 이민자의 정착지로 삼았는데, 이들은 늪지대의 물을 말려가면서 이 일대를 과수재배 단지로 만들었다. 이곳은 유럽으로 수출하고 있는 이스라엘 오렌지의 주 생산단지가 되었다.

      

 샤론 평야는 여호수아 때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나 이 지역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였다. 다윗 시대에 이르러 샤론의 일부 지역이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뒤를 이은 솔로몬 때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헤롯왕 시대 이곳에 가이사랴 항구가 건설되면서 샤론 평야의 형편이 완전히 달라졌다. 가이사랴를 통하여 로마와의 교역이 증대하면서 가이사랴와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들이 샤론 평야 내에 건설되었다. 가이사랴는 세계에서 최초로 시도되었던 인공 항구 도시였다. 가이사랴는 로마 시대에 유다 지방을 통치한 로마 총독이 주재하던 도시이다. 예수 당시 유다의 총독으로 있었던 빌라도도 가이사랴에 거주하고 있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0장 1절에서 베드로가 방문하였던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단 소속의 백부장이었다. 사도행전 8장 40절에 의하면 전도자 빌립은 가이사랴에 복음을 전하였고 사도행전 21장 8절에 의하면 후에 바울과 그 일행은 빌립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다. 바울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전도 여행 중 이곳 가이사랴를 방문하였고 로마로 호송되기 전에는 이곳에 감금되었었다. 가이사랴는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인 3세기경에 이미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었다. 가이사랴는 비잔틴 시대에 크게 번성하였고 십자군 시대에 다시 중요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십자군이 물러가면서 이슬람 마므륙 군대는 가이사랴 성채를 모래에 완전히 묻어 버렸다. 그 이후 지금까지 가이사랴는 모래 속에 묻혀 있는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최근에 이르러 가이사랴를 발굴하는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윗 사진은 가이사랴 발굴 장소 너머에 있는 지중해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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