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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Jun 09. 2024

F4. Fairchildren

 미국 서부인 캘리포니아 고향으로 돌아온 쇼클리(William B. Shockley, 1910~1989)는 학사학위를 받은 CALTECH의 유명한 화학과 교수인 베크만(Arnold O. Beckman, 1900~2004)의 Beckman Instruments에 1955년에 들어갔고, 거기서 Beckman의 투자로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를 설립하고 마침내 전자 회사에서 독립적인 연구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새 회사가 마운틴뷰(Mountain View)에 자리 잡게 된 것은 그 연세에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쇼클리의 나이 들고 자주 아픈 모친이 팔로알토(Palo Alto)에 살고 있어서 그 근처에 있고 싶은 쇼클리의 개인적인 희망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쇼클리 본인도 스탠퍼드 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가 되었다. 결국 쇼클리는 ‘실리콘밸리에 실리콘을 가져온 사람’이 되었다. 과수원과 채소밭이었던 일대를 공장 지역으로 용도 변경한 정책당국자들과 자금을 조달한 벤처 자본가(Venture Capitalist)의 노력 덕분에 이 일대가 새로운 산업의 요람이 되었다. 이 지역에 군용 비행장인 모페트 기지(Moffett Field)가 있는데, 나중에 이 안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에임즈 연구 센터(Ames Research Center)를 설립하고 일반인을 상대로 홍보 활동도 펼치고 있다. 실리콘밸리 형성 초기에 군 관련 개발 자금의 유입은 이 지역 성장의 견인차가 되었다.

     

 쇼클리는 자신의 명성과 Beckman의 자금을 이용해서 벨 전화 연구소에서 일하는 옛 동료들을 자신의 연구소로 데려오려 했으나, 그의 평판 때문에 아무도 쇼클리의 새 연구소로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쇼클리는 대신 ‘자기식’으로 일할 회사를 처음부터 만들기 위해 여러 대학교를 돌며 실력 있는 박사학위 졸업생을 모집하러 다녔다. 처음에는 네 명의 박사(PhD) 학위를 갖고 있는 물리학자를 모집하는 데 성공하였다. 쇼클리의 ‘자기식’은 어찌 보면, ‘독재적 지배와 심해지는 편집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번은 쇼클리의 비서가 엄지손가락을 다쳤는데, 쇼클리는 이것이 자기를 독살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하고는,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해서 범인을 찾도록 요구했다. 나중에 이 사건의 원인은 부러진 압핀이라고 밝혀졌고, 이 소동으로 종업원들이 쇼클리 대표에게 냉담해졌다. 그동안 쇼클리 대표는 연구원들을 개별적으로 관리하고 회사 기밀이라는 미명(美名)으로 같은 연구 그룹 내에서의 의견 교환도 엄격히 통제해 왔다. 이후 그가 요구한 소자 즉 오늘날 쇼클리 다이오드라고 알려진 소자를 개발하여 판매하는 프로젝트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쇼클리 소자는 실리콘으로 제조된 4층 다이오드(4-layer diode)로 그 당시에는 새롭고,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소자였다.

     

 1957년 말, 쇼클리 반도체회사에 있던 연구원 8명이 회사를 그만두고, 페어차일드(Fairchild Camera and Instrument) 회사로 옮겨가서 반도체 사업부를 만들었고, 쇼클리는 이들은 배신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이들 '8명의 배신자(traitorous eight)'는 블랭크, 그리니치, 회르니, 클라이너, 라스트, 무어, 노이스, 로버츠 등이었다. 이들의 나이는 당시 26세에서 33세로서 그야말로 열혈청년들이었다. 당시 이들의 학력과 경력을 다음 표에 정리하였다. 이 중 6명이 박사(PhD)였다. 이 중에서 회르니가 경험 있는 과학자였고 유능한 관리자였다. 노이스만이 반도체(semiconductor) 연구에, 그리니치만이 전자공학(electronics)에 경험이 있었다.


 이들 '배신자 8인'은 1957년 8월에 사주인 페어차일드(Sherman M. Fairchild, 1896~1971)와 계약을 맺고 1957년 9월에 Fairchild Semiconductor 회사를 설립하였다. 새로 설립한 회사는 곧 반도체 산업의 선도자로 성장하였고 1960년대에 실리콘밸리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였다. '배신자 8인' 중에는 나중에 Fairchild를 떠나 INTEL을 차린 노이스와 무어도 있었다. INTEL뿐만 아니라, 내셔널 세미컨덕터(National Semiconductor), 어드반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Advanced Micro Devices; AMD)도 Fairchild에서 갈라져 나온 회사이고, 이런 움직임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들 갈라져 나온(spin-off) 십여 개의 회사들을 후세에 ‘Fairchildre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는 쇼클리를 부자로 만들어 주지 않았고, 이익을 내지도 못했다. 그는 과학적 업적 이외에 평소에 우생학적 믿음과 언사(言辭)로 사회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회사 대표인 쇼클리에 대해 젊은 종업원들이 반기를 들고 다른 회사로 간 사건은 당시에는 일대 획기적인 뉴스가 되었다. 회사 대표의 부당한 억압에 대해서 항의의 표시로 적당한 조치라는 지적이 있었고 새로운 산업에서나 가능한 도덕적인 기준이니까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이후 업계에서 진행된 현황 즉 실리콘밸리가 형성되고 새로운 기술과 제품이 우리 사회를 혁신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긍정적인 흐름이라고 봐야 한다. 직장 선택에 대한 개인의 자유가 있고, 개인이 직장을 바꾸더라도 그 사회에 계속 존재한다면 큰 문제가 없다는 인식이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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