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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우 Nov 01. 2022

사그라지는 불꽃

말을 생각한다.

끝내 삼킨 말을 생각한다.

기지를 발휘해 옴싹달싹하던 입술을 꾹 누른 일을 생각한다.

더 유한 단어를 고르고

신경 써 표정을 짓고

가까스로 넘긴 실수 즉발의 순간.


안 하길 잘 한 말은 이렇게 기억된다.










<데미안>의 내용 중에서도 피스토리우스와의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한다.






 “피스토리우스,” 하고, 나는 갑자기,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의외였고 놀라웠던 폭발적인 악의를 가지고 말했다.


 “꿈에 관해서 한 번 얘기하시는 것이 어때요? 당신이 밤중에 꾸는 진짜 꿈 말입니다. 당신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그처럼, 그처럼 지긋지긋하게 골동품 냄새가 나니까요.”


 그는 내가 그런 투로 말하는 것을 아직까지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 순간에 내가 그에게 쏜 화살이 그 자신의 무기 창고에서 끄집어내진 것이며, 그의 심장을 찔렀다는 사실을 알고, 또 그가 때때로 아이러니컬한 어조로 말하곤 한 자기 비난을, 내가 지금 악의 있는 날카로운 형태로 다시 그에게 던진 것을 알고 번개처럼 수치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당장에 알았다. 그래서 그는 곧 조용해졌다. 나는 마음속에 공포를 느끼면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가 몹시 창백해지는 것을 보았다.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에 그는 새로 장작을 불 위에 얹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 말은 지당하고, 싱클레어, 당신은 영리한 청년입니다. 인제는 더 이상 골동품 냄새나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매우 조용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상처 입은 아픔을 그의 목소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아,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다정한 태도를 하고 싶었고, 용서를 빌고 싶었고, 나의 애정과 따뜻한 감사를 보이고 싶었다. 감동적인 말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운 채 불을 바라보고 침묵을 지켰다. 그도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우리는 누워 있었고, 불은 다 타서 떨어지고 사그라졌다. 소리를 내면서 타서 꺼지는 불을 볼 때마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름답고 다정한 무엇이 꺼지는 것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즉시 내게 한 장면이 되어 버린 구절이다. 그러니까,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나에겐 이제 사그라지는 불꽃이 보인다. 너무 선명하고 슬프게.







그래서 난,


가까스로 넘긴 실수 즉발의 순간을 종종 생각한다.

불꽃이 사그라지는 것을 운명처럼 가만히 지켜보아야 했을, 그 가능세계를 떠올리면

어느새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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