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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유 Mar 21. 2023

안 미안해도 돼.


“엄마. 내 마음처럼 안 되는 것들도 있어.
         안 미안해도 돼.”     


그날은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며칠 전 유치원에서 친구 따라 체더치즈를 밥에 올려 먹어보니 맛있더라는 딸아이 말이 기억났다. 평소 시간이 없을 때 휘리릭 만들기 좋은 달걀 볶음밥을 볶다가 크리스마스이브 저녁밥이 너무 성의 없나 싶어 집에 있던 체더치즈 한 장을 급히 넣고 같이 볶아 딸아이가 좋아하는 식판에 예쁘게 담고 특별히 식탁 매트도 꺼냈다.

외출 후 늦은 저녁에 마음이 급해져 맛을 보지 않았던 터라 나도 그 맛이 궁금했다. 

한입 먹은 딸아이의 표정을 살피는데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엄마. 치즈 넣으니깐 좀 느끼해.”

“그래? 맛있을까 하고 넣어 봤는데 이제 안 넣어야겠네. 미안해 딸.”

“엄마. 내 마음처럼 안 되는 것들도 있어. 안 미안해도 돼.”     


생각지 못한 여섯 살 딸아이의 말에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치즈를 넣으면 안 되겠단 생각보다 내가 아이 앞에서 무슨 말을 했지 되뇌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 작년은 정말 내 맘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던 힘든 한 해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결혼 9년 동안 이렇게 힘든 적 있었나 할 정도로 적잖게 맘고생도 했었다. 생활력 강한 남편 덕에 그동안 너무 편하게만 살아왔는지 남편이 짊어진 짐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밤엔 깊게 잠들지 못하고 잠을 설쳤다. 남편 말대로 나는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이기에 그 초조함과 불안감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가계 사정이 좋지 못한데 내가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감성에 젖어 시를 짓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자괴감이 들다가 내가 일을 하면 딸아이는 누가 돌봐주나 걱정하다가 혼자 말 그대로 난리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거기에 브런치 작가의 벽은 높기만 하고 매번 불합격 알림을 받을 때마다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오만가지 이유로 자책하며 날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듣게 된 딸아이의 말에 정말 난 아무에게도 안 미안해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기 합리화에 가까웠지만 딸아이 말은 내게 큰 위로로 다가왔다. 남편이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육회를 사 온다고 해서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보다 더 큰 크리스마스 선물을 아이에게 받은 것 같았다. 육회보다 백배는 더 한 감동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먹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되도록 아이 앞에선 나쁜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친구가 내가 한창 육아에 지쳐있던 무렵 자신의 아이가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난 격하게 공감하는 척하며 맞장구를 쳤지만 실은 아이가 별 탈 없이 빨리 컸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속으로 매일 생각했었다

유리 멘탈인 나는 아이가 잠들면 남편을 붙잡고 그렇게나 울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날 달래느라 진을 뺐다. 한참 후에 알았지만 남편도 산후 우울증을 겼었다고 했다. 그 원인에 9할은 아이가 아닌 바로 나였을 것이다. 태어난 아이뿐 아니라 출산한 나를 같이 케어해야 하는 상황이 버거웠을 것이다. 매일 우는 내 앞에서 같이 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루는 내가 아이에게 엄청 짜증을 내다 자책하며 울고 있는데 퇴근한 남편이 날 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울지 마. 그럴 수 있지.

근데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우린 속상하거나 힘들면 친구한테 전화해서 하소연하든 이렇게 둘이 상의하든 말할 사람이 많잖아. 근데 아이는 이 세상에 우리밖에 없어. 

아직 말이 서투니깐 행동으로 하는 건데 우리가 못 받아주면 누가 받아줘. 우리 조금만 더 힘내서 아이한테 짜증스러운 부모는 되지 말자.”     


맞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전부인 아이에게 내가 뭘 한 거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짜증을 안 냈다면 거짓말이지만 되도록 아이에게 짜증스럽게 대하진 않았다. 걸음도 늦고 말도 늦은 아이였지만 유리 멘탈 엄마는 아빠 덕분에 조금씩 성장해 이렇게 예쁜 말을 하는 아이로 키우지 않았나. 


이제 나도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다. 

우리 아이가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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