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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영 Nov 14. 2022

인생의 매몰비용

회계사, 예능 PD, 웹소설 작가.

 

내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였으나, 마땅한 산출을 얻어내지 못한 몇 가지의 업(業)들이다. 현재는 공기업에서 정책 연구를 하고 있으니, 가만 보면 나도 상당히 두서없는 삶을 살아온 듯하다.

 

각각의 업에 얽힌 사연들을 살펴보자면.

 

먼저 회계사. 경영학을 전공한 나는 군대 전역 후 떠밀리다시피 시험을 준비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남들에게 뒤처진다는 초조함이 나를 책상 앞으로 이끌었기에. 회계원리 수업만 들어본 후 곧장 공부를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적성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부딪혔던 수험생활이 순탄할 리 없었다. 수리보다는 언어 쪽과 친한 나에게 재무관리가 잽을 날렸고, 단순 암기를 힘들어하는 도전자에게 무논리 끝판왕 세법이 어퍼컷을 꽂아 넣었다. 결국 1차 시험에서 평균 2점 차이로 떨어지고 말았고,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며 결과에 깔끔히 승복하였다.

 

다음은 예능 PD. 자격증 공부를 접은 후 본격적으로 뛰어든 취업전선에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PD였다. 어릴 적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경영학으로 전공을 결정한 후에는 잊고 살던 직업. 어차피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면 도전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어린 나이가 아니었기에 합격 가능성이 낮은 PD에 올인할 수는 없었고, 일반 기업 취업도 함께 준비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토익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사, 컴퓨터 활용능력, 한국어 등 각종 자격증 콜렉터로 활동하던 어느 날.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처음으로 지원했던 SBS 필기시험에 덜컥 합격하여 현직 PD분들과 다대일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1시간가량 긴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실을 완벽히 깨달았다. 방송국에서 원하는 예능 PD의 인재상에 나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내가 시장을 너무 만만히 보았다는 것.

 

회계사 공부를 그만둘 때보다 훨씬 더 긴 고민 끝에, 나는 PD의 꿈 또한 접게 되었다. 신입 PD 자체를 잘 뽑지 않는 시장과 계속 취업준비생으로 지내기는 어려웠던 개인의 상황이 빚어낸 결과. 약간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같은 해 현 직장에 취업하면서 감정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물론 지금은 그 기억조차 희미해졌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지금의 회사를 다닌 기간도 짧다고 할 수 없을 때쯤, 이번에는 작가라는 업이 눈에 들어왔다. 가끔 시간 때울 때 웹소설을 읽으면서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라며 치기 어린 생각을 가졌던 것이 화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다룰 예정인지라 결론만 말하자면. 꽤 오랜 시간을 투입하여 작품을 50%가량 완성하고 공모전에 출품하였으나, 기대에 비해 얻어낸 관심의 양은 턱없이 모자랐다. 합격했던 대학원 등록까지 포기하고 몰두했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참패. 아직까지도 패배의 여운에서 허우적대는 중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글로 풀어보니 잊고 있던 간극의 맥락이 떠오르기는 하나, 그것과는 관계없이 이 녀석들은 내 인생에 상당량의 매몰비용을 부과했다. 그것이 금전이든 시간이든. 특히 시간적인 부분에서 꽤나 큰 손실을 입었다는 건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그것도 다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니 손실이 아니라 할 것이다. 근데, 아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확실히 아니다. 얻었다 할 만한 것들을 다 빼더라도, 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최소 2년 이상의 비용은 지불한 거나 마찬가지다. 업명(業名)으로 정리되는 나의 과거는 내 인생에 그 정도의 삽질 타임을 부여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일들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회수가 불가능한 매몰비용에 좌절하며 의미 없는 자책이나 하고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입사동기와 차이나는 연차, 그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었던 다른 것들- 일종의 기회비용 등을 생각하면 입안이 쓴 것만은 피하기 어려운 것 같다.

 

간혹 그럴 땐, 애증의 역사가 남긴 명백한 유산,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을 떠올린다.

 

나라는 인간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려면 반드시 찍어먹어봐야 하는 부류라는 것. 그래서 관심 있는 분야에 죄다 기웃거려봤으니 앞으로 최소한 같은 분야에 헛된 에너지를 쏟지는 않겠다는 것.

 

이 정도면 충분한 위안이 되지는 못해도 소소한 자기 합리화 정도는 가능하니까. 그런데 막상 글로 쓰고 보니 왠지 더욱 씁쓸해지는 기분이다. 바람이나 쐬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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