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 시절 자격지심 극복기
디자인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늘 자격지심이 있었다.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라는 것.
주니어 시절, 전공자인 동료들과 비교하며 매번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그들은 색을 고르는 감각도, 타이포를 쓰는 방식도 확연히 달랐다.
하루는 동료 디자이너들이 내 작업물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물론 그들은 내가 듣고 있는 걸 몰랐다. 많이 속상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내 디자인은 정말 올드하고 투박했다. 그날 이후, ‘디자인 감각'을 키우기 위한 노력에 불이 붙었던 거 같다. 피드백을 회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마주하고, 부족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래 경험들은 그 시절 내가 시도했던 방법들이다. 모두에게 맞는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디자인 실무에서 감각을 고민하고 있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꾸준함만 유지한다면, 노력으로 감각은 충분히 키워질 수 있다.
그 시절 나는 여유 시간마다 전시를 찾아다녔다.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을 갈 때도 주요 아트센터는 빠짐없이 들렀다. 크고 작은 전시장에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품 감상을 많이 시도했다.
어떤 작품은 잘 이해되지 않았고, 어떤 전시는 너무 난해했다. 하지만 감각은 논리보다 반복과 경험에서 시작된다. 무작정 많이 보며 시각적 기준을 내 안에 채워나갔다. 익숙하지 않은 자극은 처음엔 낯설지만, 반복해서 접하면 눈이 트이고 기준이 생긴다.
디자인은 예술과는 다른 분야다. 하지만 그 사이, 중간 지점의 심미적 시각은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건축미가 뛰어난 미술관은 존재만으로도 영감이 된다. 빛이 드는 방향, 재질, 동선, 공간의 여백 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장소에 서 있으면, 공간 전체가 하나의 그래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난 전시장 입구에서 배치된 브로셔, 독립잡지 등 편집디자인을 좋아한다. 마음에 드는 인쇄물을 발견하면 따로 챙겨서 보관하거나 구매한다.
편집디자인은 정보 배치, 여백, 리듬감, 타이포그래피까지 시각 구성의 총체다. 한 페이지에 담긴 시선의 흐름, 무게감 분배, 정보의 위계 등을 분석하며 어떤 요소가 왜 좋게 느껴지는지 되묻는 연습을 반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엔 설명할 수 없었던 ‘좋은 느낌’의 이유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이런 경험들이 누적되면, 결국 내 작업에도 반영된다. 레이아웃을 짤 때 더 빠르게 결정하고, 타이틀 크기나 간격을 잡는 감도 나아졌다. 인쇄물에 담긴 조형의 원칙은 디지털 매체에서도 유효하다.
심미적으로 좋은 것들을 많이 보는 것은 중요하다. 일종의 인풋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이런 인풋의 데이터들이 많이 쌓이고 시간이 누적되면서 아웃풋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편집디자인을 이해하려면 결국 타이포그래피로 들어가야 한다.
타이포의 개념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크다. 타이포그래피는 낱자 하나의 균형, 자간과 행간, 시선의 흐름, 가독성과 정보 전달까지 아우르는 정교한 분야다. 이 기본기를 이해하면, 레이아웃과 구성에서도 단단함이 생긴다.
폰트, 활자를 만드는 디자인 영역은 따로 존재한다. 낱자부터, 낱자가 조합되는 과정까지 모든 시각적 사항을 고려해서 탄생되는 게 폰트 타입이다. 디자인 필드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과정들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공부할 필요가 있다.
타이포그래피 안에는 모든 디자인의 기본 중에 기본이 다 담겨있다. 이를 한 번이라도 관심 있게 보아둔 디자이너들은 실무 디테일과 완성도가 다르다. 로만체를 기본으로 한글까지 유심히 한 번 더 공부해 보는 걸 추천한다.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을 가진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많이 읽었다. 블로그, 브런치, 인터뷰, 디자이너들의 책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들의 세계관을 접했다. 특히 왜 그 방식으로 일하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태도에 주목했다.
디자이너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드는 직업이다. 그래서 그 결과물에 대해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지속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정체성이 있는 디자이너는 스타일이 아니라 방향이 분명하다.
균열은 티 나지 않는 아주 작은 금으로 시작된다. 디자인 가이드가 깨지고, 통일성이 틀어지고,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건 처음에 티 나지 않는다. 시작은 아주 작은 금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대응하기 귀찮아 순응만 하다가는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냥 와장창 깨져버린다.
디자이너로의 본인 길을 멀리까지 내다 보자. 주변의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찾아보고 올바른 정체성이 자리 잡도록 하는건 매우 중요하다.
이미지를 찾거나 레퍼런스를 모을 때, 꼭 맞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찾아봤다. 90% 만족에서 멈추지 않고, 100% 이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 그 과정은 때로 고되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결국 남는 건 눈의 기준이었다.
주니어 시절엔 특히 이 연습이 중요하다. 반복하다 보면 ‘좋은 것’과 ‘아주 좋은 것’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눈이 생긴다. 그 눈이 생기면, 시간은 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감각을 쓸 수 있게 된다.
서칭뿐 아니라 색 조합, 레이아웃 구성, 콘셉트 리서치 등 모든 시각적 인풋에 이 태도를 적용했다. 감각은 결국 디테일에서 완성된다.
한 번은 작은 배너 하나를 만드는 데 하루를 다 쓴 적도 있었다. 이미지와 카피의 조화를 위해 수십 개의 조합을 시도하고, 가장 적절한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 새벽까지 모니터를 붙잡았다. 지금은 그런 시간이 줄었지만, 그 시절의 몰입이 지금의 기준을 만들어줬다.
디자이너는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전 직장에서 야근이 많았는데, 밤을 새우고 바로 다음날 클라이언트를 만나야 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나는 ‘야근용 셔츠’, ‘편한 슬랙스’, ‘각 잡힌 안경’을 따로 준비해 뒀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좋지 못하다. 하지만 시각을 다루는 디자이너는 예외일 수 있다. 첫인상이 작업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디자이너의 복장, 말투, 표정, 자세 모두가 ‘디자인 감각’처럼 기능할 수 있다.
감각은 삶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공간, 인테리어, 책상 정리, 옷차림까지 — 이런 사소한 선택들이 하나의 디자인 언어가 된다. 나는 매일 사용하는 노트와 펜, 브라우저 북마크 하나까지도 내가 어떤 디자이너인지 보여주는 작은 조각이라 생각한다.
또한, 패션 감각도 업무의 연장선이라 여겼다. 컬러 배색, 실루엣, 질감의 조합은 옷차림에서도 연습할 수 있다. 옷장을 정리하며 ‘오늘은 어떤 무드의 디자이너처럼 보일까’를 고민하는 일도 감각 훈련의 일부였다.
디자인 감각은 타고나는 것보다 쌓이는 것이다. 잘 보고, 오래 보고, 자주 보고, 그걸 나의 언어로 다시 꺼내 쓰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본기를 다지고, 좋은 인풋을 꾸준히 채우고, 나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 그게 쌓이면 어느 순간, 디자인 감각은 ‘내 것’이 된다.
이 글이, 누군가 감각과 실무 사이에서 고민하는 디자이너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