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권 Nov 11. 2022

가장 먹고 싶은 옛날음식 1위, 보릿국

 고향친구가 늦장가를 갔다. 신랑은 오십이고 신부는 그보다 두 살 많았다. 둘 다 초혼이라 그런지 잔뜩 긴장되어 허둥거리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았다. 사람이란 나이 들수록 낯가림이 심해지는 모양이다. 친구 결혼을 핑계 삼아 이십 여명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동창회에서도 보기 힘든 얼굴들까지 합류하였다. 우리는 예식장 뷔페에서 이른 점심을 먹으면서 지나온 세월을 더듬었다. 각자 살아가는 이야기, 자식들 이야기, 종교이야기, 정치이야기, 건강이야기 등을 주고받다가 누군가의 입에서 “여기 진짜 먹을 것 없다!”하는 말이 나왔다. 그때부터 친구들 입에서는 그 예식장 뷔페음식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다. 내가 가늠하기로도 제법 비싼 호텔이었는데, 손님들에게 드시라고 펼쳐놓은 음식은 가장 싸구려였을 뿐만 아니라 맵고 짜고 달고 하여 이건 도무지 맨 정신으로는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직접 문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입맛을 씁쓸하게 다시면서 “그래도 옛날 음식이 맛있었어!”하고 지나온 기억을 더듬었을 뿐이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구나. 요새 시간이 나서 신랑이 같이 여행을 잘 다니거든. 여행가면 빠질 수 없는 게 먹거리잖아? 근데 솔직히 맛있는 음식 만나기 쉽지 않다. 말만 그 지역음식이라고 하지 막상 가서 보면 다들 옛날 음식이 아니라 요즘 음식이더라.”

 “진짜 그래. 서울시내에서 아무리 맛있다는 음식점 가 봐도 비싸기만 하지 별로야. 그러면서 어린 시절에 먹었던 음식이 생각나더라. 봄에 돌나물 뜯어다가 비벼먹는 맛, 참죽나무 이파리 뜯어다가 자반이나 부각해먹던 기억들......”

 친구들 입에서는 옛날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쏟아져 나왔다. 가난했던 시절에 억지로 밥상에다 올려놓았던 음식들이 이렇게 살만한 세상이 오자 새삼스럽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는 표정들이었다. 요즘 건강식이라고 하는 것들은 죄다 우리 가난한 시절에 먹었던 음식들이다. “야, 누가 이런 옛날 음식을 파는 식당 한 번 해봐라. 그럼 틀림없이 떼돈 벌 거야!”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또 다른 누군가가 맞받았다.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옛날 음식을 어떻게 재현하냐? 이젠 어려워.” 대부분의 친구들이 동의하였다. 그러다가 또 다른 친구가 너희들은 가장 먹고 싶은 옛날 음식이 뭐냐고 물었다. 딱히 사회자가 있는 토론이 아니었으므로 이야기는 중구난방이었고 여기저기 무리지어서 이야기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질문이 던져지자 갑자기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친구 A가 먼저 무릇으로 만든 조청을 먹고 싶다고 하였다. 서너 명이 동조하면서 무릇조청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들이 잠잠해지자 친구 B가 쑥인절미가 먹고 싶다고 하였고, 몇 명이 비슷한 발언을 했다. 친구 C는 도랑가에서 살찐 봄미나리를 캐다가 생으로 무쳐서 양푼에다 놓고 밥을 비벼먹고 싶다고 하였다.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30여분 흘렀을까. 친구 S가 보릿국을 먹고 싶다고 하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어나면서 “아, 맞아. 보릿국!” “나도 가끔 보릿국 생각했는데.....”“그것 먹어본 지 오래다!”“보리순 씹는 질감이 쫄깃거리면서 좋았는데......”“ 거의 모든 친구들 입에서 보릿국에 대한 추억이 한 마디씩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친구들이 가장 먹고 싶어하는 음식 1위는 보릿국이었다.

 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다들 그러구나! 우리만 가난해서 봄날 내내 보릿국을 먹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하고 말했다. 친구 F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옛날에는 부자고 가난한 사람이고 먹는 건 비슷했지. 봄이면 보릿국 끓여먹고, 소리쟁이 국 끓여먹고, 시래기 국 끓여먹고 다 그랬던 거지.” 그 말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동의했다. 그랬구나!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리는 저절로 자라는 들풀이 아니다. 가을에 벼설겆이가 갈무리되면 곧바로 이어지는 일이 보리갈이다. 논에 가는 보리갈이는 ‘둔덕보리’라 했고, 밭에 가는 보리를 ‘골보리’라고 했다. 벼를 베어낸 논에 그냥 몽근 씨앗을 뿌리고 경운기로 골을 갈아서 거기서 나오는 흙을 덮는 ‘송장보리갈이’도 있다.

 보리는 본능적으로 겨울을 나야 한다는 걸 알기에 씨앗을 뿌리고 수분만 있으면 금방 싹을 내민다. 적어도 겨울이 오기 전에 대여섯 가닥의 뿌리를 짱짱하게 땅속에다 박아놓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보리순은 보드랍고 가녀린 이파리로 겨우내 찬바람을 이겨낸다. 보리가 얼어 죽지 말라고 ‘보리밟기’를 하는데, 그 일은 힘들지는 않아도 후딱 해치울 수 있는 일도 아니어서 아이들은 금방 싫증을 냈다. 보리밭에 온 식구들이 한 줄로 늘어서 마치 펭귄처럼 걸어간다. 식구들이 걸어간 땅에는 신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보리밟기가 끝나면 여자들은 한해농사가 시작된다. 여자들은 품앗이를 하여 보리밭고랑에 앉아서 본격적으로 들풀과 호미씨름을 해대는데, 뚝새풀, 광대나물, 별꽃나물, 벼룩나물 등이 호밋날에 뽑혀진다. 보리가 너무 베게 난 곳도 솎아주어야 한다. 이때도 보리순을 뿌리채 뽑아내서 밭가로 던진다. 어슬어슬 땅거미가 깔리면 여인들은 일어나서 자신들이 솎아놓은 보리순을 망태기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당에다 망태기를 엎어놓고는 보리순을 칼로 다듬어서 국을 끓인다. 그러니까 보릿국을 끓여먹기 위해서 일부러 보리순을 캐지는 않았다. 보리순은 자라서 소중한 곡식이 되기 때문에 함부로 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맘 때쯤이면 각종 묵나물도 다 떨어지고, 땅에다 묻어둔 김장김치도 바닥나는 철인지라 풀내 풀풀 나는 보리순이 들어간 국은 식구들한테는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요즘이야 하우스가 있어서 겨울에도 딸기를 비롯하여 온갖 채소를 다 먹지만, 옛날에는 그럴 수 없었잖아? 생각해보니 보리순이 얼마나 고마운 풀이었는지 알겠어. 그 추운 계절에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채소이자 나물이었잖아?”

 “우리 엄마는 파릇파릇한 보리순이 둥둥 뜬 국에다 아직 뜸이 들지 않은 밥을 말아서, 호호 불며 식혀서 나한테 주었어.”

 “보리순은 떡을 해도 맛있었어. 맷돌에 갈은 보릿가루에다 물을 붓고 보리순을 넣어 주물럭거리면, 마치 황토에다 지푸라기를 넣고 짓이기는 것처럼 반죽이 되잖아? 그걸 대충 넓적하게 만들어서 찌면 그게 바로 보리개떡 아니냐?”

 “맞아. 대충 만들어 먹는 떡이라고 해서 개떡이라고 부르지. 그래도 맛이 있었어. 그건 땃땃했을 때도 맛있지만 식었을 때 더 맛있지. 보리개떡은 텁텁한 보릿가루의 감촉이랑 오래 씹히는 보리순이 잘 조화를 이룬 음식이야. 씹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보리순 특유의 싱그러운 단맛이 우러나는데......가장 원초적인 단맛이라고나 할까?”

 “내 조카가 초등학교 선생님인데 한 번은 나한테 보리개떡이 뭐냐고 묻더라. 교과서에 개떡이 나오는데, 아이들이 개떡에 대해서 묻는데 몰라서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한 번 해주겠다고 해놓고는 아직까지 못 해줬네. 말나온 김에 이번에 한 번 해봐야겠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자기들도 불러달라고 하였다.

 보리순은 별꽃줄기나 광대나물이랑 같이 나물로 무쳐지기도 하였는데, 그때는 다른 나물에서 느낄 수 없는 씹히는 맛이 좋았다. 그렇게 밥이라도 비벼먹으면 아이들은 배가 짱구가 되는 줄도 모르고 먹게 된다.  

 “말나온 김에 우리 보리음식 먹으러 갈까? 보리개떡은 힘들지만 홍어애국 잘하는 곳을 내가 알거든. 당연히 보리순이 들어간 국이지. 홍어애국에는 보리순이 들어가야 비린내도 없애주고 맛이 나잖아?”

 “난 홍어 안 먹는데, 그냥 보릿국도 나오냐?”

 “당연하지. 그 집은 직접 시골에서 보리순을 조달해다가 음식을 해. 보리순이 떨어지면 시래기를 넣어서 해주는데, 그건 맛이 없잖아? 내가 전화 한 번 해볼게.”

 친구 H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동안 우리는 모두 이상하리만큼 말이 없었다. 모두다 간절히 보릿국을 먹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이전 10화 겨울의 끝자락에 맛보는 구수한 소리쟁이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