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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권 Nov 11. 2022

정월대보름 날 호호 불면서 먹었던 넘나물국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지면 아이들은 모아놓은 깡통 중에서 가장 큰 것을 골라 못으로 바람구멍을 내고 철사로 손잡이를 묶는다. 그런 다음 앞으로 돌리기, 옆으로 돌리기, 머리 위로 돌리지, 엇갈리게 돌리기 등 다양한 연습을 하면서 달덩어리가 커지기만을 기다린다. 드디어 달덩어리가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날,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았건만 성급한 아이들이 불깡통에다 불을 살리기 시작한다. 어른들은 저녁이나 먹고 나가서 놀아라, 하고 큰소리치지만 이미 들뜬 아이들의 발길을 막을 수는 없다. 그맘 때쯤이면 해토머리 땅은 이미 푸슬푸슬 질퍽거려서 불깡통을 돌리면서 들로 달려 나가다 보면 신발에 떡이 되도록 흙살이 달라붙는다. 그래도 아이들은 마냥 즐겁고 여기저기 보리밭을 밟고 다니면서 불깡통을 돌린다. 돌리고 또 돌리고, 가끔씩 옷이며 머리카락도 태워먹고, 나중에 지쳐갈 때쯤 불씨가 가득 살아있는 불깡통을 하늘 높이 던진다. 그러면 불깡통에 가득 찬 불씨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찬란한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그 불꽃놀이가 갈무리되면 그제야 아이들은 추위도 느끼고 헛헛함도 느끼면서 근처 친구네 집으로 몰려간다. 그날은 어느 집을 찾아가더라도 부담없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오곡밥에다 여러 가지 묵나물들을 해먹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오면 어른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아이들은 부엌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부엌이 가장 따뜻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부엌바닥에다 간단하게 상을 펼쳐두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오곡밥을 퍼서 넘나물을 말아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몽당수수수 빗자루나 나무청에 있는 나무를 깔고 앉아서 허겁지겁 넘나물국이 말아진 밥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어어 추워, 어어, 추워. 이제야 몸이 좀 풀리는 것 같네.”

 아이들은 따뜻한 국이 몸을 데워주고 나서야 그날 놀았던 일들을 떠올리며 떠벌린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밥 좀 더 주세요.”하고 빈 그릇을 내민다. “아이고, 그래. 얼마든지 있으니까 많이 먹어라.” 어른들이 사발이 넘치도록 넘나물국에다 밥을 말아주면, 아이들은 받아서 천천히 먹으면서 건더기를 젓가락으로 건져서 보고 시래기나물, 다래나물, 아주까리나물, 명아주나물, 고구마나물 등을 보면서 먹는 여유를 찾는다. 

 “오늘 아침에 우리집에서 먹을 때는 넘나물국이 맛이 없던데, 여기서 먹으니까 맛있네요.”

 “원래 그런 것이다! 넘나물은 씹을수록 맛있지야?”

 “예, 아주 맛있어요!” 

 아이들은 넘나물국을 먹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예쁘게 꽃을 피운 원추리를 떠올린다.

 원추리는 뒷산에 가면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풀이었지만 꽃이 하도 예뻐서 옛사람들은 몇 포기를 파다가 울안에다 심어놓았다. 주로 참나무 숲에서 살아가는 원추리는 줄기도 크지 않고 번식력도 강하지 않다. 그러나 정원에 심어져서 햇살을 잘 받고 퇴비를 먹게 되면 그 어떤 풀하고 겨뤄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줄기가 무성해진다. 그렇게 정원에서 자라는 원추리를 보고 자라온 아이들은 “국속에 있는 건더기가 원추리를 말린 것이라니 믿어지지 않아. 어떻게 화초를 먹어?”하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야생 원추리나물을  먹어본 적이 있는 아이들이 말해준다.

 “어, 너 넘나물국 첨 먹어보냐? 사실은 이것보다 생원추리로 만든 나물이랑 국이 더 맛있어. 너도 먹어보면 반할 거야. 씀바귀처럼 쓰지도 않고, 씹을수록 단맛이 나와.”  

 “단맛이 난다고? 봄나물은 대부분 쓰거나 약간 맵던데?”

 “아냐, 진짜 달아. 우리 할매는 원추리를 봄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하셨어. 그만큼 맛있어. 그걸로 비벼먹으면 끝내준다고. 난 원추리국도 좋아. 향긋한 냄새가 나.”

 “나도 먹어보고 싶다!”

 원추리나물을 맛보지 못한 아이들은 넘나물국을 먹으면서 원추리 풋것으로 무친 나물이나 국을 나름대로 상상해보고, 봄이 오면 꼭 어른들에게 해달라고 해야지 하고 중얼거렸다. 어른이 아닌 친구들이 맛있다고 했기 때문에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더구나 단맛이 난다고 했기 때문에 더 먹어보고 싶었다.

 요즘 대형마트에 나오는 원추리는 모두 하우스에서 키운 것이다. 예전에는 하우스가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풋것을 먹었고, 그것이 하도 맛이 좋아서 나머지 철에도 먹으려고 묵나물을 만들었다.

 원추리는 줄기가 부드럽고 씹히는 맛이 좋았으며 줄기에서 특유의 단맛이 우러나와 누구나 좋아하는 나물이었다. 게다가 줄기를 뜯기도 쉽고 따로 다듬을 필요도 없다. 이파리가 넓고 가지런해서 마른 검불이 붙지도 않았다. 이렇게 이파리가 넓적하다 하여 ‘넒나물’ 혹은 ‘넘나물’이라고 부른다. 모든 봄나물이 그렇듯이 원추리도 때를 놓치면 먹을 수가 없다. 조금만 웃자라면 줄기가 뻣뻣해져서 삶아도 질기고 단맛도 약해진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원추리 포기가 10센티미터 안쪽일 때가 가장 단물이 많이 베어있다. 이때 낙엽을 헤집고 뿌리 바로 윗부분까지 뜯어내면 된다.

 병아리들이 부화하기 좋은 날, 원추리는 난초처럼 길고 갸름한 잎이 솟아오른다. 어른들은 그런 원추리 어린 순을 손으로 뜯어서 지푸라기로 엮어다 팔았다. 삶은 다음 말려서 묵나물을 하기도 했지만 그냥 엮어서 시래기를 만들기도 했다. 햇살과 바람에 말려진 원추리 시래기는 주로 겨울철에 국거리가 되어 식구들의 살이 되었다. 보름날 끓여진 넘나물국도 그렇게 말려진 원추리가 주인공이다. 원추리 풋것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그걸 씹어 먹으면서 “나물은 말려서 먹으면 이렇게 맛이 달라지는구나!”하고 묵나물의 맛을 알아간다. 그런 어린시절을 거치면서 어른이 되었을 때 진짜 묵나물의 맛과 가치를 알게 된다. 풋것은 땅에서 갓길어올린 싱싱한 단맛을 풍기지만 아무래도 묵나물 특유의 깊고 은은한 단맛을 우려내지는 못한다.

 옛날 선비들은 원추리를 ‘훤초(萱草)’ 혹은 ‘망우초(忘憂草)’라고 불렀다. “비 지나서 뜨락 옆에는 파란 싹이 길었구나/해는 한낮 바람 솔솔 그 그림자 서늘하구나/슬한 가시 얽힌 잎새 한 그림도 다사한저/너로 하여 잊었거나 아무 시름 내 없노라” 이 글은 신숙주가 안평대군에게 바친 시이다. 뜨락 옆에서 파란 싹을 내민 것은 원추리다. 신숙주는 원추리를 보고 근심을 잊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아마도 꽃의 아름다움에 빠지면 괴로운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옛날 선비나 화가들은 원추리꽃을 즐겨 그렸다. 여자들은 말린 원추리 꽃을 몸에다 지니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의남초(宜男草)라고 불렀다. 원추리 뿌리는 캐서 쌀이나 보리를 섞어 떡을 만들어먹었다. 그러니 가뭄에는 사람의 생명을 연장해주는 구황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추리로 만든 최고의 음식은 원추리꽃색반이지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랫마을 친구네 집에 가서 먹어보았는데, 아직까지 그렇게 황홀하면서도 향기 좋은 밥은 먹어본 적이 없어요. 눈과 입 아니 온몸으로 그 향기가 느껴졌어요. 원래 원추리는 꽃을 따서 꽃을 제거하고 쌈을 싸먹기도 해요. 밥 할 때도 그렇게 해요. 그러면 원추리색이 노랗게 우러나서 밥을 물들이고 향기도 좋아요. 그 밥을 먹고 나오는데 몸이 날아갈 것 같고,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안 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뭔가를 먹고 그런 생각을 해보기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나는 원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꼭 이렇게 끝을 맺는다. 원추리꽃색반에 대한 찬양을 하면서, 최대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원추리꽃색반을 해먹어보고 그런 기분을 느껴보라고 한다. 그러면 꼭 원추리가 된 기분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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