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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난 이작가 Nov 15. 2022

나의 작음이 수치스러워

07. 내가 너무 작아. 이 작음이 수치스러워.

고진옹    (혼잣말) 왜 하필 난데? 왜 하필?  

    

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 

허수인 들어온다.      


허수인    누가 왔는데 이렇게 시끄러워?      


고진옹,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다.      


고진옹    차라리 다른 여자들처럼 비명을 질렀으면 좋겠어. 강한 척하는 게 날 더 숨 막히게 해. 

허수인    행복에 겨운 소리 한다. 

고진옹    날 이해하는 것 같지만 조금도 이해 못 하는 거 같아.      


사이.      


고진옹    노조가 와해될 것 같대. 회사 압박도 심하고. 손배송이랑 가압류로 숨통을 조일 모양인가 봐. 사람들이 흔들린다고.      


허수인,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벽을 내리친다.  

     

허수인    구심점이 없어서 잠깐 그런 거야.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하는데. 

고진옹    나가면 뭐가 달라지는데?

허수인    달라지게 만들어야지. 자본주의 생태계가 얼마나 잔인한지, 회사가 얼마나 사람들을 개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지 환기시켜줘야지. 

고진옹    소용없어.    

허수인    고진옹! 또 약해진다.  

고진옹    약해질 필요 없어. 우린 강한 적이 없었으니까. 땅에 내려왔으니 그들은 이제 아쉬운 것도 없겠지. 

허수인    또 올라가. 백번이고 천번이고 또 올라가. 

고진옹    아니, 그런 일 없을 거야. 지옥이었어.      


노크 소리. 

고진옹과 허수인, 문 쪽을 보면. 

경찰들과 보좌관이 안상태 국회의원을 모시고 들어온다. 

그들은 앞서 달려가 의자까지 빼주며 극진하다. 

경찰, 일어나지 않는 고진옹과 허수인에게 눈치 준다.      


경  찰    안상태 국회의원이십니다.      


고진옹과 허수인, 느닷없이 나타난 안상태가 의아하여 쳐다본다. 

안상태,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      


경  찰    일어나세요.      


고진옹과 허수인, 어정쩡하게 일어나고.   

   

안상태    아니, 됐습니다. (보좌관에게) 자리 좀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보좌관    의원님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경  찰    충분히 쓰세요.      


보좌관이 경찰에게 같이 나가자는 제스처를 취하고.      

 

경  찰    (깍듯이 인사하며) 말씀 나누세요.     


모두 나가고.      


안상태    앉지.      


안상태, 담배 두 개비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안상태    피워. 

고진옹    여기서?

허수인    국회의원 면책특권 불체포특권에 흡연특권이 추가됐나 보네.      


허수인이 담배 한 개비를 가져다 손으로 두 동강 내고 던져버린다.   

   

안상태    그래, 그래야지. 강성 노조 자존심은 그 정도 돼야지.  

고진옹    왜 왔어?

안상태    이제 그만해. 

허수인    굴뚝에서 내려오니까 박수 치러 왔어? 

안상태    세상이 바뀌었어. 최루가스 뚫으면서 돌 던지던 시대가 아니에요. 

고진옹    알아. 그래도 네가 우리 사정 잘 아니까 도와줘야지. 

안상태    그럼, 그럼. 

고진옹    사측에서 손배송을 50억이나 했대. 노동자들한테 50억이 말이 돼? 그런 걸 왜 입법하지 않아? 

안상태    바로 그게 시대착오라니까. 옛날처럼 너도 못 살고 나도 못 살아서 ‘우리도 인간이다’ 하면 응원해주던 시대가 아니에요. 이제 국민들은 노조를 싫어해. 

허수인    뭐?

안상태    노조를 싫어한다고. 아주 싫어해. 

허수인    너 국회의원 맞지? 노동운동 했다는 훈장으로 노동자와 약자 대변하겠다고 표 구걸하던 안상태 맞지?   

안상태    국민들 정서가 그래. 월급도 많고 상여금에 퇴직금도 탄탄한데 툭하면 파업하니까. 귀족노조라고 손가락질해요. 게다가 수천만 원 주고 차 샀는데 불량과 결함 많지, 근무 태만으로 노동시간에 스마트폰 한다는 소문 돌지, 기업 발목 잡아 주식도 떨어지게 하지. 

고진옹    상태야. 나 여기서 일한 지 30년 됐어. 30년 됐는데 나가래. 내 인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야. 그런데 가만히 있어?

안상태    그래, 그 맘 알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 해. 30년 일했으면 됐다고 생각하지. 공무원도 아니고. 고용주 마음이지.       


허수인, 못 참겠다는 듯, 일어나 거칠게 의자를 밀어내고.     


허수인    우린 예나 지금이나 노동자로 고생하는데, 배에 기름 두르고 훈장질하려고 나타났냐?     


안상태, 개의치 않고 차분하게 자기 말을 이어간다. 


안상태    사람들 지지를 받으려면 경영진 입장도 생각해 봐. 경영진은 노동자들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아요. 바이어들과 가격협상 해야지, 환율 따져야지, 이산화탄소 배출 절감도 모색해야지, 공장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야지. 게다가 파업으로 영업 손실이 엄청나면 그건 또 어떻게 메꾸겠어. 머리가 터질 일이지.   

   

허수인, 안상태에게 다가가 윽박지르듯.     


허수인    너 한우근이랑 대학 선후배라더니, 앞장서서 빗질해주겠다고 약속했냐? 그래서 우리 설득하려고 온 거야?     


안상태, 참 뻔뻔하고 얄밉게 자기 의견만 피력한다.      


안상태    잘 생각해. 미래자동차 재정적으로 힘들다. 부도나면 모두 끝이야. 지역경제며 협력업체 하청업체 연쇄 부도지. 좀 더 멀리 봐. 회사부터 살려야, 일자리가 유지되지. 공장에서 조립만 하니 전체가 안 보여 이러지.      


허수인, 분노가 터져 나와 큰소리로 따진다.  

    

허수인    도대체 그렇게 되도록 회사는 뭘 했냐? 나라는 뭘 했고, 잘난 국회의원은 뭘 했어?     


고진웅, 진정하라는 듯, 허수인 손등에 손을 올린다.    

  

안상태    세상이 급변하는데, 노조는 너무 그대로야. 고집스럽고 답답하고 맹목적이고.   

   

안상태, 넥타이를 정리하고 양복을 매만지며 일어날 기미를 보인다.      


안상태    그래도 옛정 생각해서 들렀어. 변호사도 선임해줄게. 굴뚝에서 내려왔으니 이제 협상카드도 없잖아. 마음만 정하면 구치소에서 바로 나갈 수 있어. 복직도 될 거고. 노조만 접으면 돼. 한우근이 맘고생 좀 했나 봐. 특별히 나한테 부탁하더라.      


안상태, 일어난다.      


안상태    결정은 빠를수록 좋아. 

허수인    미친놈! 

안상태    네 아들 준호 고3 아니냐? 우리 승진이랑 같은 나이잖아. 준호 대학도 보내야지. 아들, 신경 좀 써라.      


안상태, 미소 짓고 인사하듯 오른손을 들어 보이고 나간다.     


허수인    권력이 좋긴 좋나 보네.     


그대로 앉아 있는 고진웅.     

              

고진옹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허수인    저런 놈이 잘못된 거지. 노동 현장에 잠깐 걸친 걸 프로필 삼아 국회의원 해먹질 않나. 지가 회사와 노조 협상의 귀재처럼 거들먹거리질 않나.      


허수인, 침울해 있는 고진웅을 쳐다보다가,     


허수인    놀아나지 마. 뒷배가 되어줄 돈줄 때문에 저러는 거야. 저놈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줄 알잖아. 국민? 나라? 개가 웃을 일이지. 오로지 다음 선거밖에 없어. 

고진옹    내가 너무 작아. 이 작음이 견딜 수 없고, 수치스러워. 

허수인    쓸데없는 생각 한다. 

고진옹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고 누구는 사장이 되었는데, 난 고작 같은 자리에 앉아 부속품만 끼워대고. 그것도 그만하라고 쫓겨나고. 그런데도 기어이 다시 들어가겠다고 매달리고. 

허수인    비교하지 마. 넌 충분히 열심히 살았어. 

고진옹    멍청하게 열심히만 살아서 이렇게 쉬운 인생이 된 거 같아. 

허수인    왜 네 가치를 밟아? 

고진옹    착하다, 성실하다, 정직하다, 그런 게 미덕인 줄 알고, 그렇게 살면 잘 사는 건 줄 알고. 병신같이. 

허수인    병신 아니야. 잘 살았어. 착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고진옹    그렇게 말하지 마, 제발! 그렇게 날 세뇌시키지 말라고. 더는 당하고 싶지 않아.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허수인    약속을 안 지킨 건 그들인데, 왜 네가 자책을 해?

고진옹    우린 그들을 이길 수 없어. 우린 늘 불리했어. 

허수인    결국 이길 거야. 결국 다 정규직 되고 다 복직되고 다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고진옹    그런 날은 오지 않아. 모두 알고 있지만 서로 속이고 있을 뿐이야. 

허수인    흔들리지 마. 

고진옹    너도 날 속이고 있잖아!

허수인    그만해! 

고진옹    그래, 그만할 거야.      


사이.     


허수인    (의미를 알고) 미쳤어!

고진옹    그래, 그동안 내가 미쳤어. 미쳐서 날뛰었어. 미쳐서 저 꼭대기에 날 가둬놓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 일하게 해주세요, 제발 일하게 해주세요, 등신처럼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내가 그랬어. 내가 미쳐서 그랬어. 

허수인    진옹아, 이러지 마. 네가 이러면 안 되잖아. (울컥한다) 우리가 상징이 되기로 했잖아.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횃불이 되자고 했잖아. 성호형이랑 같이 맹세했잖아. 

고진옹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오지 않아. 그저 미끄러질 뿐이야. 그저 늙고 병들고 성호형처럼 사라질 뿐이라고. 이제 우리도 현실적이 되어야 해. 

허수인    노조를 접겠다는 거야? 아니지?     

고진옹, 대답 없고.      

허수인    372일이야. 37일이 아니라 372일이라고. 1년 넘도록 굴뚝에서 버텼는데. 이제 와 접겠다는 거야?  


고진옹, 침묵. 

허수인, 고진옹 멱살을 잡고 흔든다.      


허수인    제발 정신 좀 차려.   

   

고진옹, 허수인을 거칠게 뿌리치고.   

   

고진옹    이제 그만 괴롭혀. 의로운 척, 대담한 척, 꿋꿋한 척, 그만 좀 해! 나한테 강요하지 마. 난 안 하고 싶어. 

허수인    진옹아.

고진옹    준호도 고3이야. 내가 뭐라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아버지가 되어서 그놈 미래를 가로막진 말아야지.      

허수인    핑계 찾지 마. 

고진옹    핑계라도 좋아. 준호는 적어도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진 않아.       


고진옹, 홍성호 조끼를 벗는다. 

홍성호 조끼가 바닥에 떨어진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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