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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n 10. 2024

마신 건 술이 아니라 한국의 소울

돈키호테에 갔다. 도쿄 중심가의 돈키호테는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유명한 만물 잡화상이지만, 주택가나 지방에 있는 MEGA란 글자가 붙은 돈키호테는 마트로서의 역할에 좀 더 무게감을 두어 야채나 생선 같은 신선식품도 취급한다. 처음에는 내가 보아온 돈키호테와 조금 다른 이질적인 모습에 약간의 불신감이 들기도 했다. 여기 들어오고 있는 고기들은 정말 신선한 것일까? 질 나쁜 물건을 구색 맞추기 용으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닐까? 그 후, 메가돈키는 돈키호테에서 운영하던 마트 체인이 노선변경 한 것이라는 걸 알고 불신은 사라져 지금은 거리낌 없이 잘 사고 있다. 주로 가는 것은 다른 마트지만, 가끔 가면 생소한 상품도 있고 재미있다.


진로 1.8리터 페트병


주말의 파티를 앞두고, 우리는 돈키호테로 향했다. 금요일은 삼겹살 블록을 할인하는 날이라 삼겹살과 소주, 그리고 몇 가지 주전부리를 살 것이다. 그동안 산쇼사와 만들어 먹는다고 한 주 동안 많이 마신 바람에 소주가 빨리 떨어졌다. 먼저 술 코너부터 갔다. 평소라면 쿄게츠를 찾았겠지만 이번만큼은 진로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LED라이트코스터가 붙어있다. 값도 비등비등하고 맛도 비슷비슷하고 어차피 사야 하는 것이라면 뭘 더 주는 걸 사는 게 낫지 않겠는가. 덤으로 주는 코스터의 유혹에 넘어가 그렇게 진로를 손에 들었다.



집에 와 열어본 봉투 안에는 아이폰 무선 충전기처럼 생긴 얇고 세련된 플라스틱 원반이 나왔다. 일반사단법인 전일본 스나쿠연맹 (*스나쿠: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파는 작은 바 비슷한 술집)가 추천하는 상품이며, 6종의 발광모드가 탑재되어 있다는 LED라이트 코스터였다. 프로 공인? 기대감이 커졌다. 


그럼 전일본 스나쿠연맹이 추천한다는 코스터의 기능을 살펴보자.


갑자기 가정집 나이트클럽


과거의 참이슬 프로모션 상품이었던 참이슬 발광 코스터와 참이슬잔 


이전에도 진로는 이런 걸 베풀었다. 단색으로 깜빡거릴 뿐이라 이번 것보다는 재미없지만 그래도 존재 자체가 신기했던 발광 코스터, 한국 식당에서 볼 수 있는 참이슬이라 적힌 소주잔. 소주잔 프로모션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몇 년째 계속해 오고 있다

그뿐인가. 


https://youtu.be/jmPHrbAmoEM?si=_l4QqN4vPcEDFaLX

참이슬 일본 웹광고 1

https://youtu.be/pb9e4589WfI?si=jlk8YOfJ1c72c-La  

참이슬 일본 웹광고2


몇 년 전, 진로는 한국 로맨스 드라마의 클리셰를 재현한 웹광고를 만들어 참이슬 코너에 작은 모니터를 붙여놓고 반복해서 틀어놓기도 했다.


그 속에서 여주인공은 라면에 참이슬을 마시고, 여주인공과 아들이 만나는 것을 반대하는 재벌집 사모님은 '아이고, 머리야' 하며 머리를 싸맸다. 남자주인공은 아버지와 술을 마실 때 몸을 돌려 마시고 '여기요, 참이슬 주세요'라고 주문한 참이슬은 '짠' 하고 말하며 잔을 부딪힌다거나, 병뚜껑을 딸 때 회오리를 만들려 했는데, 중간중간 '진짜?'나 '대박'같은 한국어가 등장하는 광고를 보고 있으면 작은 실소와 함께 맞장구를 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좀 흐뭇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진로 주식회사가 노리는 것은 일본 내에서 진로와 참이슬과 참이슬톡톡과 테라를 가능한 많이 팔아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이겠지만, 진로가 한국 술임을 전면에 내세우고, 술은 물론이거니와 그 안에 녹아있는 한국의 정서를 함께 팔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한국인으로서 뿌듯하기도 했다. 남편과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보며 재미있어하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코스터나 소주잔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집에서 마시더라도 기왕 마시는 거 한국에서 하는 대로 그 잔에, 흥 내면서 마셔보라고. 차게 식힌 소주를 따른 소주잔을 코스터 위에 얹고 방을 컴컴하게 하자, 그 옛날 학생시절, 호프집에 가면 누구 생일이라고 갑자기 서프라이즈로 불빛 번쩍거리고 터보의 해피버스데이투유가 흘러나오던 때가 떠올랐다.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가게 안의 모두가 축하해요 하고 박수를 신나게 짝짝 쳐주던 그 정겹고 흥 넘치는 술자리. 


그걸 모르는 일본인 남편은 지금 이 광경을 보고 느끼고 떠올리는 것은 나와 다르겠지만 어쨌든 신이 나는지 덩실덩실 빠른 BPM의 아리랑 같은 어깨춤을 췄다. 그래, 안 겪어봐도 묘하게 전달되는 느낌이 있을 거야. 오늘 너와 내가 마신 건 소주가 아니라 한국의 소울이렷다. 부어라, 마셔라. 홀린 듯 유튜브에서 클론의 초련을 찾아 틀고 코스터와 함께 나도 발광하기 시작했다.


"내일 이거 하나 사자."


사자마자 술병에서 떼어내 신나하는 중


다음 날, 우리는 다시 돈키호테에 갔다. 그 하루동안 LED라이트 코스터에 이끌린 이들이 우리뿐만은 아니었는지, 이게 붙어있는 상품은 딱 두 개만 남아있었다. 다시 하나 얼른 손에 들었다. 이제 두 개 있으니까 한 사람이 하나씩 코스터로 쓰면 되고, 흥이 오르면 양손에 들고 클론처럼 춤도 출 수 있다. 고장이 날 경우를 대비해 스톡으로 하나 더 사둘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 자리에 남겨두었다.


이미 두 개나 사가고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이제까지 한국 소주를 사본 적 없는 누군가가 이 코스터에 소유욕이 생겨 진로를 사고, 한국의 소울을 마시고, 그것이 우리나라에 대한 흥미와 호감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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