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은 귤과 바나나 말고는 잘 먹지 않는다. 물에 씻고 껍질 깎는 게 귀찮아서. (물론 누가 깎아주면 잘 먹는다) 과일도 그렇지만 좀 손이 가는 귀찮은 식재료들은 처음부터 논외로 하는 경우가 많다. 밑단에 흙이 묻은 상추처럼 꼼꼼히 씻어내야 하는 것이나 요리를 하기 전에 물에 담가 핏물을 빼야 하는 갈빗대처럼 전처리에 시간이 걸리는 것들도.
그런 내가 지난 불금에는 껍질 까기 지옥에 떨어졌다. 녹두빈대떡 때문이다.
한국에 살 땐 명절마다 먹던 것이었다. 엄마가 전날부터 불려둔 녹두는 다음 날 오후 부와아앙 큰 소리를 내는 오래된 믹서기에 갈려 곤죽이 됐다. 거기에 고사리며, 숙주나물이며, 돼지고기 간 것을 넣고 나면 그제야 구워낼 수 있었던 녹두빈대떡.
나중엔 어차피 지겹도록 해야 하는 거라며 엄마는 명절에도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깨너머로 보이고 들리는 건 있어서 명절에 나오는 음식들은 대체로 사람 귀찮게 하는 녀석들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타향살이 중에 종종 그 맛을 떠올리면서도 혼자 만들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남편이랑 같이 하면 손이 네 개니까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해서 녹두를 찾았다.
일본은 타향살이 레벨이 낮은 나라 중 하나일 것이다. 동네 슈퍼에만 가도 어지간한 건 다 있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잘 안 보이는 것이 녹두다. 팥이나 찹쌀, 보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녹두는 큰 마트에 가야 겨우 볼 수 있을까 말까. 이것도 수입식품코너에서 겨우 발견했다. 집에서 보던 녹두는 노란색이었던 것 같은데 품종이 살짝 다른가, 그래도 녹두니까 괜찮겠지 하고 덥석 집어 들었다.
D-day인 금요일을 앞두고, 목요일 저녁에 녹두를 꺼내어 물을 부었다. 어느 정도 하면 좋을지 몰라 500그램을 다 탈탈 털어부었다. 스테인리스 통에 담고 보니 절반도 되지 않는다. 물에 불어봤자 얼마나 불겠어, 다 하길 잘했다 하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녹두빈대떡 레시피를 찾아보았다. 사진마다 녹두들이 다 노란색이다. 종종 망했어요, 하는 글들을 보면 '껍질 있는 걸 사서 손으로 다 까게 생겼어요. 흐엉' 하는 성토글이었다. 그때 알았다.
아뿔싸. 나도 망했구나.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날 오후까지 녹두는 자꾸 불어났다. 손으로 비비면 껍질이 벗겨진다 해서 한 줌 쥐고 양 손바닥 사이에 끼고 비벼보았는데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포도처럼 손끝으로 한알씩 잡고 꾹 누르는 게 빠를 정도였으니까.
오랜 시간 싱크대 앞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까려니 삭신이 쑤셔 왔다.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내며 녹두그릇을 들고 와 바닥에 앉았다. 이제 곧 불혹이라 그런가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일본인인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면 '하루모니(할머니)'라고 한다. 내가 하루모니면 자기는 하라보지면서. 퇴근 카드를 찍고도 거센 폭우로 오도 가도 못하는 하라보지를 기다리며, 녹두 한 알 한 알 쉬지 않고 껍질을 벗겼다.
그런데 20분, 40분, 한 시간. 속알맹이는 착실하게 늘어 가고 있는데 이제부터 껍질을 까야할 것들은 도무지 줄지 않았다. 총량보존의 법칙은 어디에 가버렸는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 녹두들이 자가분열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이러다간 빈대떡은커녕, 껍데기만 까다 하루가 끝나겠다 하여 두 손으로 빨래하듯 조물거려 보았다. 이제까지 시험해 본 그 어떤 것보다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몇 번 주무르지도 않았는데 손바닥에 껍데기가 우수수 묻어 나왔다. 진작 이렇게 할걸! 후회가 막심했다. 부모님 어깨 주무르는 효자처럼, 나는 녹두를 주무르고 물을 붓고 버리고를 하다 깐 녹두 쪽의 양을 불리고자 무작위로 떠서 한알씩 선별작업을 했다. 그때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껍질 좀 들어가도 상관없어."
조금만 더 빨리 말해주지...
그래도 노력의 시간이 아까워 지금까지 깐 것만 가지고 껍질 한 톨 없는 반죽을 만들었다. 대가 굵은 고비밖에 없어 고사리는 생략했지만 숙주나물, 간 돼지고기 만으로도 제법 그럴싸했다. 굵게 갈린 녹두 알갱이가 씹힐 때마다 감칠맛이 더해졌다. 그날은 나도 남편도 더운 날 밖에서 고생을 하고 와서 먼저 맥주로 목을 축인 다음에 소주를 곁들였다. 캬, 이 맛이야. 여름엔 기름에 지지고 튀기고 볶은 요리가 더 맛있게 느껴진다. 만드는 건 배로 더 고된데 땀 흘린 만큼 더 맛있는 걸까.
빈대떡은 프라이팬으로 4장 분량이 나왔는데, 녹두는 아직도 한참 남아 있었다. 껍질을 까도 양이 줄지 않는 건 먹어도 쉽게 줄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저 스뎅 그릇이 퍼도 퍼도 줄지 않는 신비한 요술그릇, 오병이어의 기적 뭐 그런 것일까. 물에 불린 걸 오래 놓아두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 한 독자님의 황금 같은 어드바이스를 활용해 점심 저녁 두 끼로 닭 녹두죽을 만들어 먹었다.
통닭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여기선 조각낸 부위별로만 팔아서 (*통닭을 파는 곳도 아주 드물게 있긴 하다) 닭다리 정육에 통마늘, 멥쌀, 녹두를 한꺼번에 넣고 끓였다. 황기나 대추 같은 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플래시보 효과인지, 왠지 모르게 기력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덜 깐 녹두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래서 3일째에는 숙주나물 대신 김치를 넣은 녹두빈대떡을 또 해 먹고 말았다. 껍질이 까진 것과 까지지 않은 것이 반반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그냥 다 같이 갈아버렸다. 비리거나 깔깔할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던 걸로 보아, 이 정도 무딘 혀를 가지고 있으면 그냥 밥 할 때 넣는 콩이다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 갈아 넣어도 별미라 좋다 하며 먹었을 것 같다. 그저께 3시간에 걸친 나의 노력은 그냥 오랜만에 팔운동 열심히 잘한 것으로.
그렇게 삼일에 걸쳐 세 끼를 내리 녹두 음식을 먹으며 500그램을 완식 했다. 어렸을 때 축농증에 좋다는 할머니의 민간요법 때문에 생녹두를 갈아 마셔야 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참 괴로웠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녹두가 남을 경우, 추억여행 삼아 오랜만에 마셔볼까도 싶었는데 다행히 그전에 녹두 파티가 막을 내렸다.
빈대떡과 공포의 간녹두물, 이 두 가지 이외엔 딱히 조리법도 알지 못하는 생소하고 귀찮은 재료라 생각했는데 조물조물 신공의 발견으로 녹두를 미리 불려두기만 하면 껍질 벗기기도 그렇게 애먹이는 건 아닌 것 같고 (신경 끊고 그냥 먹는 것도 방법이고), 뭣보다 서걱서걱한 그 식감과 맛이 좋아서 앞으로도 애용하게 될 것 같다. 특히 닭죽엔 무조건 녹두다. 뭐든 한 번은 해보고 생각해 볼 일이다.
빈대떡은 무려 남편 분께서 이리 말씀하셨다. '우리 집 대표메뉴 중 하나로 하자'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굽는 건 남편이 했는데 그의 부침개 굽는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있는 것도 기쁜 일이다. 혹여 나중에 일본생활을 접게 되는 날이 와도 이 친구는 광장시장에 취직하면 되겠다 싶다. 나는 옆에서 떡이라도 썰고.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빈대떡을 부치거라.) 아니다. 김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