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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Sep 02. 2024

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1)

나는 지금 얼음을 가득 넣은 콜라를 들이켜고 있다.


간헐적 단식이 허락한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깜빡했다거나, 너무 배가 고파서 가 아니라, 지금 이걸 마시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아서 마시고 있다. 오늘은 공복 운운 할 때가 아니다. 곧 공복보다 더 무서운 일이 펼쳐질 것이다.


몇 시간 뒤 시어머니가 오신다.

남편 없이, 나 혼자 있을 때.


문제의 발단은 어젯밤 9시 즈음, 남편에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였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물소리를 피해 방에 가 전화를 받던 그가 '아, 아... 아아... 좀 어렵겠는데...' 하며 돌아와서는 수전의 레버를 잠그자마자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려 내게 내밀었다.


'?'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내가 나가야 할 순서인 것 같아 인사를 했더니 시어머니가 '지인과 한국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자유시간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뭘 물어보고 싶다'고 하셨다. 여기선 '한국인이니 한국을 잘 알 것이다'라고 오해를 받는데 사실 나온 지 10년이 넘어서 뭐 아는 게 없다. 외국인 관광객만 살 수 있는 패스 정보 같은 건 더더욱 모른다. 그래도 얼마나 막막하면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나한테 연락을, 싶어 '뭐가 궁금하시냐' 물어보니 그건 만나서 물어보겠다며, 내일 낮에 우리 집에 오시겠다 한다.


시어머니는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만 골라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이상한 소리를 하신다. 그래서 둘이서 이야기하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데 당장 내일 낮, 남편이 없을 시간에 온다 하시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든 남편이 퇴근한 이후로 시간을 만들고 싶어 '차라리 저녁시간대에 만나 같이 식사도 하면 어떠시냐'라고 했는데 식사는 하게 되면 하는 거로 하고 자꾸 남편 퇴근보다 빨리 오신다고 우기셔서 최대한 미루고 미룬 게 4시가 되었다. 5시쯤에는 남편이 올 테니 1시간만 참으면....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우리가 답정너의 덫에 빠져있었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꼭 우리 집에서 만날 필요는 없는데. 시댁에 간지도 좀 됐으니 시아버지한테 인사도 할 겸 우리가 가는 게 낫지. 그럼 시어머니랑 단둘이 이야기할 상황도 모면할 수 있다. 오전 시간은 내 페이스대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시어머니도 장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깨달음의 시간까지는 채 3분도 걸리지 않았건만 시어머니는 다시 건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남편이 내일 우리가 가겠다는 메시지를 남겨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까지도 답장이 없어 남편이 책임을 지고 다시 연락하기로 했지만, 바로 답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가는 것은 나다'라고, 시어머니 안에서 이미 그렇게 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체념한 나는 아침 7시부터 청소를 시작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오늘, 남편은 주방에 아이스커피를 쏟아놓고 나갔다. 싱크대 위에만 쏟았다더니. 툴툴대며 바닥을 닦다가 기름때가 낀 가스레인지가 눈에 보였고, 그렇게 찬장, 싱크대, 바닥, 화장실, 세면대, 욕실까지 청소를 했다. 시어머니의 눈과 발이 닿을 만한 곳은 전부 다. 둘만 있을 때 무슨 말을 하실지 모르니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고.


그래도 청소를 하다 보니 마음이 좀 풀린다. 처음엔 같이 어질렀는데 누구 엄마 온다고 나 혼자 이러고 있는 게 한심하고 짜증도 나고 온몸이 땀에 젖어 불쾌했지만 이런 핑계라도 있어야 대청소를 하지, 이런 생각이 들어서다. 그리고 우타마로. 중성세제인데도 기름때 진짜 잘 닦인다. 그나마 얘가 있어서 한시름 덜었다.


시어머니와 연락이 닿은 것은 청소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뛰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남편의 라인은 알림창 겉으로만 읽으시고 내게 전화를 하셨다. 어차피 걔는 피에로고 내가 피에로 조종자인 것을 아시는 거다.


이러저러해서 저희가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연락드렸다 하니 시어머니는 '집에 오는 건 좋지만 시아버지가 있으면 시끄러워서 싫다. 나는 그냥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데'라고 하셨다. 시아버지가 마이크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시끄럽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럼 어머니 방에서 이야기하면 되잖아요'라고 해도 부득불 시아버지가 시끄럽다고, 내가 집에 가는 게 메이와쿠(迷惑, 민폐)라면 밖에서 만나서 점심을 먹어도 되고, 자기 대접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우기셔서, 더 말하기만 곤란해졌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꼭 나와 단둘이 이야기를 하셔야 하는 것이다. 정말 여행 이야기만으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본인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니요' 라 하지 않은 나는 더 이상 도망칠 구석도 없다. 전화받자마자 당황하지 말고 잘 생각해 보고 말했어야 하는데 기세에 밀려 '네'해버린 내 탓이다.


무슨 착한 며느리 흉내를 내겠다고. 


결국 본전도 못 찾았다. 시간까지 시어머니가 원하는 2시로 앞당겨졌다. (아니 사실 1시 말하셨는데 내가 곤란하다고 해서 2시가 됐다. 일부러 처음부터 긴박한 시간으로 말씀하신 것 같다.) 하, 멍청한 나.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남편이 처음부터 같이 있지 않는 이상, 1시간을 버티든 몇 시간을 버티든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우리 엄마라면 나를 이렇게 들들 볶지도 않았을 거고, 들들 볶더라도 더 명확하게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에겐 할 수 있는 말을 왜 하지 못하고 이렇게 쩔쩔 매고 마는 걸까. 얽힌 인과 연을 떠나, '내'가 정말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어느 쪽인 걸까. 혈연관계가 아니라 해서 박하고 모질게 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좀 씁쓸하다.


"소주 마시고 맞이해."


어제 남편이 농담처럼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근데 진짜 그래야 할 듯하다. 그래야 간이라도 배밖으로 나와 착한 며느리 흉내라도 덜 내지 않겠는가.


이미 콜라도 마셔버렸지만 오늘은 정말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않다.

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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