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람 Sep 03. 2024

시자는 어쩔 수가 없어

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2)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거실을 쓸고 닦느라 체력을 소진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신적 대미지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일까.


어제는 점심 먹을 틈도 없이 약속 시간이 되었다. 3분전에 도착한 시어머니는 에어컨부터 켜라 하신다. 많이 덥지 않아 평소처럼 창문을 열고 에어컨 없이 지내고 있었다. 미리 틀어놓을까도 생각했지만 그게 또 어떻게 비칠지 몰라 오시면 틀기로 했다.


내가 일을 하는지 남편에게 물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왜 궁금하실까. 당신 아들만 고생하고 나는 벌어다 준 돈 팡팡 쓰면서 호의호식하는 거로 보이나. 이어지는 남편의 말에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네 편을 들어 글 쓴다고 했어."


내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는 걸 시부모에게 퍼뜨리는 것이 무슨 내 편이 되는 행위인가는 차치하고, 직업인 양 부풀려 말해야 했을 정도로 시어머니의 질문엔 가시가 있었음이 느껴졌다. '벌이는 있나 보네'라는 혼잣말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얼굴 마주할 때마다 '나중에 우리 돌보는 건 며느리 일' 소리도 자꾸 하시는 걸 보면 자신의 역할에 대한 고민보다는 며느리가 가진 노후대책의 효능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가 싶다.


한편으로는 내가 도움을 드리는 입장인데 아침 댓바람부터 집을 싹 청소하고 에어컨 틀고 말고까지 걱정해야 한다는 게 우습다. 뭐가 무서워 이렇게 발발 떨고 있는 것인가. 


남편과 얽히지만 않았으면 그냥 아줌마 아닌가.


그냥 아줌... 아니, 시어머니는 한국여행 가이드북을 사오려 했는데 마땅한 게 없더라며, 유통기한이 9월 말까지인 냉동 아스파라거스 한 봉지와 소분한 버섯, 작은아버지가 우리 주라고 주고 가신 우동면, 남편이 본가에 두고 간 와이셔츠만 건네주셨다. '비싼 거니까 잘 다려서 입혀라'라고 하는 말과 덧붙여.


맨손으로 오시지 않고 뭐라도 챙겨 오신 것이 감사하지만 냉정하게 바라보면 다른 분이 주신 것, 다 못먹고 처분할 식재료, 아들이 집에 남겨둔 옷. 이제부터 당신을 도울 나에 대한 인사치레라기보다 이거로 우리 아들 밥해주고 옷 다려주라는 것으로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그렇게 시어머니는 4시간을 내리 앉아계시다 가셨다.




'가고 싶은 곳은 정했는데 지도가 없어 동선을 못 짜겠다'던 시어머니가 정해두었다는 곳은 언젠가 티브이에서 보았던 장소의 나열에 불과했다. 그나마 적어둔 쪽지도 사라졌다 하여 내용 확인도 하지 못했다. 


사실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렇게 '우리 집은 아버지가 시끄러워 이야기할 수 없다'고 우기셨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시아버지가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면,


'뭘 그런 것까지 물어봐.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여행을 가겠다고'

'가면 알게 될 걸 뭘 물어보는 거야. 그리고 그걸 얘가 다 어떻게 알아?'

'언제까지 물어볼 거야? 애들 이제 보내.'


이러셨을 것이다. 당신 귀에 듣기 싫은 말, 방해가 되는 말을 하니 시끄럽다는 의미였다. 남편도 방해물이었을 것이다.


아아, 그래서.


나를 자유롭게 쓰기 위해서.




한국어 한마디 모르는 아줌마들이 무슨 생각으로 표부터 덜컥 사버렸을까. 유명 여행사의 2박 3일 투어는 한 사람당 12만 엔이나 하는 것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자유시간이었다. 티켓을 사기 전에 여행의 목적 먼저 정하고 그것에 맞추어 스케줄을 짜는 것이 순서일 터이나 '같이 가는 지인이 절을 좋아해 절에 가는 옵션을 넣었다'는 이야기만 하지 시어머니는 이 여행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일본인 대상으로 절 투어가 다 있나? 해서 보니 경복'궁'에 가는 거였다. 본인이 신청한 것이 '사'찰인지 '궁'인지 제대로 읽지조차 않은 것이다.


무슨 바람이 들어 한국에 가고 싶어진 걸까. 어쨌든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고 최소한의 계획은 있는 상태에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대책도 없이 일부터 벌여놓고 어쩌다 얻어걸린 한국인에게 금 나와라 뚝딱 할 게 아니라, 그런 '몰라서 못하겠는 것'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한다.


시어머니란 위치를 이용해 '물어본다'는 말로 속여가며 플랜을 짜게 하는 것도, 노력 없이 사람을 찔러 뭘 얻으려는 것도 놀부 심보다. 우리 부모보다 나이도 어린데 훨씬 더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구는 것도 화가 난다. 그럼 투어는 어떻게 신청했는가.


일렁이는 감정들을 억누르고 카카오맵을 켜 호텔 근처 관광지를 추천했다. 얼마나 가보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쓸데없는 동정심도 일었고, 그냥 아줌마 아니고 남편과 잘 아는 아줌마니까 참았다. 


그런데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 시어머니는 호텔에서부터 아까 그 관광지까지 카카오맵으로 함께 걸어보길 원했고, 지하철 표 사는 법, 한국 돈 단위는 어떻게 되는지, 한도 끝도 없이 '알려달라고' 했다. 가이드북 하나만 샀어도 나왔을 내용이지만, 고작 북오프 (*일본의 중고책 서점 체인) 하나 들려보고 마땅한 게 없었다던 시어머니는 공항 픽업버스의 하차장소에서 호텔까지 가는 길까지 물어보셨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엄마가 물어봤으면 생각대로 발설했을 것. 설마 여행사 직원이 내리세요 하고 그냥 가겠어? 하다못해 지도라도 주겠지. 안 주면 물어봐. 어차피 미리 길 찾아보는 거 의미 없어. 외우지도 못할 거고. 길을 잃어도 그건 그거대로 여행의 재미야, 하면서.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남의 엄마가 뭐라고, 남의 엄마라서. 


그런데 다 귀찮고 어렵다고 한숨을 푹푹 쉬시더니 나중엔 '타이완은 자유시간 없는 투어가 있어 좋았는데 한국은 그게 없다'며 이상한 푸념을 하셨다.


원래 말 못 하면 해외여행은 힘들어요. 여건이 안 맞는 여행이면 그만두고 가시지 말아야-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힘드시면 제가 대신 갈까요? 저는 한국 너무 좋은데.', 아들이랑 진짜 닮았네요'라고 치환해 내뱉었다. 최대한의 항의였다. 효도여행 갔다가 부모님 투정에 힘들었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왜 남편 엄마에게, 같이 간 것도 아니고 일본에서 그 기분을 맛보아야 하는 것인가.


무엇보다 진짜 목적을 감추고 사람을 이용하려 드는 시누나, 뭐든 물어봐서 해결하려는 남편의 모습. 저 남매의 싫은 부분이 다 어디에서 나왔나, 하는 것을 알자 짜증을 넘어 무력감이 일었다. 콩 심은 데 콩 난 거고, 이미 다 콩이 되어버렸으니 그 콩들이 갑자기 팥으로 개과천선하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겠구나. (이 콩 포함)


그런 시어머니는 아들이 퇴근하자 부리나케 짐을 싸 돌아가셨다.

우리 아들 배고픈데 어서 밥 먹고 쉬라고.




시어머니는 오늘 너무 고마웠다며, 다음에 꼭 답례하겠다 메세지를 보내왔으나 그것이 빈말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 입 발린 말에 속은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내게도 할 일이 있어 4시가 되면 이쯤 해서 파해요, 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나의 오늘 하루를 버리고 끝까지 원하는 대로 해드렸던 것은, 한번 철저하게 맞춰드리면 미안해서라도 더는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으실 것이고, 남의 딸을 대하는 태도도 좀 달라지실까 해서였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이날 목적은 '한국여행 일정을 짜내는 것'이었고, 그걸 달성했고, 내 며느리가 고맙기는 해도 남의 딸의 고통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앞으로 또 한국여행을 가시는 날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나를 쉽게 쓰시려 할 것이다. 우려했던 '여행 외의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건 시어머니가 마음을 예쁘게 먹기로 결심해서가 아니라 목적 달성이 바빠 다른 말을 할 여유가 없었고, 어제는 내가 '아주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평소처럼 은은하게 깔 수 없었을 뿐.


"오늘 정말 수고했어."


이런 남편도 짜증 난다. 본인들도 하기 귀찮은 걸 엉겁결에 떠맡은 '남'에게 미안해 해야 하는 게 먼저 아니냐. 제대로 아껴 주지도 않는 며느리 자리가 뭐라고, 하고 싶지도 않고, 티도 나지 않는 대리효도를, 효도받고 싶은 사람 본인에게 효도라는 감각도 없이 요구당했다는 생각만 든다. 


"이번에 같이 가는 사람은 서울에 간 적이 있는데 딸이 다 데려가서 어디 갔었는지도 잘 모른대. 그래서 우리 아들 부부가 한국에 갔다 온 적이 있으니 물어보고 오겠다고 했거든. 근데 아들한테 물어봤자 걔도 모를 거 아니니. 덕분에 살았다. 지인이랑 만나서 오늘 들은 이야기 해보고 어디 갈지 정하려고."


며느리가 한국 사람이니 물어보겠다도 아니고, 우리 아들 부부가 한국에 갔다 온 적이 있으니 물어보겠다니. 기가 막혔지만 코도 막고 물었다. 아침 비행기니 공항 근처에서 전박(前泊, 전날 미리 가서 묵는 것)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에비스에 있는 지인 딸 집에 묵기로 했어. 에비스? 그 집값 비싼 동네요? 응, 그 집 딸이 의사랑 결혼해서 잘 산대. 


이제야 퍼즐이 맞춰진다. 자기 딸도 도쿄에 있는데 굳이 남의 좋은 집에 묵으면서 하나쯤은 큰소리치고 싶은 뭔가가 필요했던 것일까. 


허무하다.

내가 잘해봤자 어차피 공치사도 돌아오지 않는 일을 나는 왜.


시어머니는 나와 함께 있는 시간 내내, '사돈 어르신들도 한번 만나뵈어야 하는데 모처럼 한국에 가면서도 지인이 있어 따로 시간을 낼 수가 없네, 죄송해서 어쩌니.' 같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전 01화 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