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3)
어제 낮엔 과자 부스러기나 주워먹다가 이른 저녁으로 레토르트 육개장을 끓였다. 과자는 며칠 전 남편이 먹고 싶다고 해서 산 쌀과자고 육개장은 엄마가 준, 아껴두었던 것이다. 전자는 악에 받쳐 씹어 먹어 없애버렸고 육개장은 한 숟갈 한 숟갈,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삼켰다.
전날 저녁을 빨리 먹어 간헐적 단식의 16시간은 이미 10시 반부터 해금 상태다. 배도 고프다.
아직도 마음이 언짢은 상태이지만 뭘 먹어야 할 것 같아 냉장고 문을 열었다. 두부 반모가 나왔다. 덮어둔 랩이 살짝 열려있어서 이거 먹어도 되나? 하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싱크대 위에 떨어뜨렸다. 원래대로라면 잽싸게 주워 물로 헹궈 썼을 텐데, 순간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일어 오른손으로 두부를 움켜쥔 채 쓰레기통 앞으로 갔다. 페달을 거칠게 밟아 뚜껑을 열고 두부를 쥔 손을 들어 쓰레기통 안에 힘껏 처넣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왼손에 들고 있던 두부용기도 던져 넣었다. 씩씩대는 내가 괴물 같았다.
일본인 시어머니에 대한 나의 분노는 삼일이나 계속되고 있다.
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화나게 하고 있는걸까. 나의 분노의 원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 그간 시어머니가 자행해 왔던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언동에 대한 임계치 도달
- 10분 넘게 전화통화를 하며 둘만의 만남을 거절했는데 시어머니의 궤변에 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좌절과 이 사람과 정면승부를 해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무력감
- 쿠우키오요무(空気を読む, 공기(분위기)를 읽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눈치를 보는 일본인인데 시어머니가 나는 그 '대상 외'로 치고 필요할 땐 또 '일본에서는' 운운하며 나를 머저리 취급... 아, 이거 1번의 구체적인 내용인가.
- 잠깐 와서 뭐 물어볼 것처럼 하고는 4시간이나 나를 괴롭히고 '고맙다' 하는 시어머니의 뻔뻔함.
- 아직 만나본 적 없는, 한국 우리 부모님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는 것에 대한 언짢음
- 초기대응에서 해버린 두 가지 실패. 첫 번째는 처음 전화를 받은 남편이 제 선에서 컨트롤하지 못하고 내게 토스해 버린 것과 두 번째는 시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좋은 마음에 '네' 해버린 것에 대한 후회.
- 내 기분과 상관없이 상대에게 끝까지 좋은 기억만 남겨주고만 스스로에 대한 혐오.
- 재발방지를 위해 적극적인 대책을 생각하지 않는 남편에 대한 불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마음만 상하니 최대한 빨리 잊고 지금까지 이상으로 시가와 거리를 두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처일 것이다. 어차피 시어머니는 관계가 만들어 낸 관계, 이제까지 만났던 성격 나쁜 회사 상사들에게 했던 것처럼 아 눼눼 그렇습니까, 하고 집에 가 맥주 한잔 마시며 욕 한번 시원하게 해 주면 끝일 그런 사람. 회사 사람보다 심지어 만나는 횟수도 적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그런데 내 화살에는 이미 불이 붙어버려서, 활시위를 당겨 어디론가 날려버리지 않으면 내가 타버릴 것 같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들까지 하나하나, 지옥에서 온 계란처럼 노랗고 선명하게 떠올라 얼른 활시위를 당길 것을 부추긴다.
그리고 본 사건보다 더 커져버린 나의 분노는 스스로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쏘아져 나가야 할 방향을 잃고 어째서인지 나와 남편, 우리 스스로에게 박히고 있다. 어제는 귀가 중인 남편과 전화로 한바탕 하고 말았다. 한참을 퍼부어도 듣기만 하는 남편에게 뭐 아무 말이 없냐니 맞는 말이라 뭐라 할 말이 없단다. 성격 이상한 할망구를 맡겨놓아 미안한데 그 사람이 이제 와서 변하지는 않을 거라 어쩔 수 없다, 나의 말을 그저 들어주는 것 밖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 말이 내게는 또다시 '참아'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의 원가족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남편은 좋은 아들, 좋은 오빠로 있고 싶은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도, 막상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가 오자 아무 말없이 내게 스피커폰으로 들이밀고 만 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 축조된 어긋난 관계 탓일 것이다.
"이혼한 척할래?"
"....."
"그럼 너네 가족이란 사람들이 나한테 막 못할 거 아냐. 진짜 남이니까."
"....."
"뭣하면 진짜 하던가."
전화를 끊었다. 중간에 어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통화를 하던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서 이불을 쓰고 누운 내 등을 끌어안았지만 뿌리치고 불을 끄라고 했다. 불 꺼진 방에서 한참을 서로 말없이 핸드폰만 하다가 각자 다른 방에서 잠들었고, 남편은 아침에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출근했다. 나는 다녀올게, 라는 그의 말에 '응' 하고 짧게 대답했을 뿐 내다 보지 않았다.
정말은 이미 알고 있다. 이건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 불편하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란 것을. 지금 이 분노의 근본적인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반복되는 갈등요소를 제거하고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다. 그러나 이미 걷잡을 수 없어진 분노는 잠잠해질 줄을 모르고, 모두에게 좋은 얼굴을 하고 싶은 남편은 정작 가장 많이 얼굴을 마주하고 사는 나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이들은 오늘도 평온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손을 뻗은 것 같이 새싹이 난 완두순, 부드러워진 햇볕을 받고 기분 좋게 윤기를 띄고 있는 다육이, 선선해진 바람, 푸른 하늘, 가느다란 가을 냄새, 하잘것없는 일에도 터져 나오고 말던 두 사람의 웃음 가득한 공간.
이 좋은 것들을 난 다 놓쳐버리고 있다.
한심할 노릇이다.
냉동실이 꽉 찼으니 시어머니가 가져온 냉동 아스파라거스나 먹어 없애버려야 겠다. 본인 냉장고에서 얼마나 묵혔는지 처음부터 유통기한도 얼마 안남은 것이었고. 1킬로나 되는데 몇번을 먹어야 다 없어질까. 내 마음의 소용돌이도 아스파라거스와 함께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