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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Sep 13. 2024

이를테면, 접착제로 붙인 갈빗살 같은 관계

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4)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것은 지난주 수요일. 진득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감정선이 요동치는 글을 쓴 다음엔 뭘 쓰기가 참 머쓱하다.  


말도 마찬가지다.


그날 남편의 귀가 후, 우리 둘은 거실에 마주 앉았다. 그는 휴가 전에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하고 싶었을 것이고, 나는 지긋지긋한 '시의 잔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뭐라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애꿎은 서큘레이터 버튼만 꾹꾹 눌렀다. 2단계 바람은 시끄러워 틀지 않지만 오늘은 소음이 고맙다. 둘이 있는 거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한 건, 왠지 싫다.


"今日は何してた? (오늘은 뭐 하고 있었어?)"


웅웅 거리는 둔탁한 소음을 헤집고 남편이 물었다. 생각한 말이 여과 없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우리끼리 상처를 주고받아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목구멍까지 차오른 소리들을 뱃속으로 도로 돌려보냈다. 그 바람에 뇌의 제어장치가 느슨해졌는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머릿속을 떠돌던 이 말 저 말들 중 가장 강력한 부류의 것 하나가 목소리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 네 원가족과는 만나지 않을 생각이야."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最初はよくわからなかった。(처음엔 이해가 안 갔어.)"


이 분노는 어제오늘로 급조된 감정이 아니다.


밥때에 잔심부름을 시키면서도 아들에게 밥 한 끼 먹여 보낼 줄 모르는 집이었다. 밤 9시 넘어 전화해 '티브이에 유튜브가 안 나오니 지금 와서 고쳐라'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면서 OTT ID 이용정지는 어떻게 풀고 구독료를 청구시키더니 '얼마 안 되니 효도한셈 쳐'라고 하는 집. 


남편과 처음 친정에 갈 때, '유이노(*한국의 함 비슷한 것)도 안 했으니 시가가 선물을 보내는 게 일본 법도'라 우기더니 때가 되자 '한국 사람들 뭘 먹는지 모르겠다'며 짜증스럽게 투덜대던 집. '사케와 고급 안주세트면 좋아하실 것 같다' 했더니 과자 상자 하나와 슈퍼에서 파는 마른안주 몇 개를 비닐봉지에 담아 건네주던 집.


결혼 후 첫 정월엔 일본에선 남의 집 오는 날 아니라며 시누와 그 남자친구가 오는 날 와서 걔네 접대나 도우라던 집. 거기엔 자기 요구 안 들어줬다고 결혼 결심 연락을 핑계로 여행 직전에 찬물을 끼얹은 시누도 있는데, 지금은 입적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도 자기 사정 때문에 본가에 내려와 놓고는, 갑자기 자기 왔는데 집에 안 오고 뭐 하냔 식으로 자기 오빠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런 집.


이해가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남편은 그들의 행동 대부분에 관대했다. 스며들듯 하는 무시도 본인에게 대하듯 흉허물없이 대하는 것뿐 나쁜 뜻은 없을 거라 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취급도, 나에 대한 취급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나는 둘 다 불편했다.


언제까지고 원가족에게 끌려다니는 남편이 답답했다. 우리는 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원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혈연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원들은 추구하는 이상이나 목표, 이해관계도 궤도를 달리하게 되었다. 여전히 본가 이층 방에 살던 그때처럼, 아들과 오빠를 종속적인 관계로 보고 행동하는 그들은 무례했고 용인하는 남편이 가여웠다. 역학관계가 이렇게 빤한데 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자랐으면 이렇게 될까.


'일본은 한국보다 가족관계가 드라이하다던데 어째 이 사람들은 미안함도, 고마움도, 선도, 아무것도 없네. 보는 눈이 늘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못할 것 같은데.'


내 눈은 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행동들이 가능했음을 간과했었다.




"백보양보해 너는 그럴만한 관계성이라도 있지, 내가 왜 너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데?"


따지고 보면 나와 시가족, 그들과의 관계는 식용접착제로 붙여진 가짜갈빗살 같은 것이다. 원래 붙어있던 살이 아니라 혼인으로 기워붙인 새로운 살점. 애초부터 남의 살이고 접착제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게 아슬아슬하다. 결혼은 어제까지의 생판 남을 오늘부턴 쉽게 대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님에도, 그들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갑의 마운드에 섰고, 나도 자연스레 을의 자리로 향했다.


내 뇌도 유교에 절여졌는지, 아니면 엄마가 당하는 걸 보며 알게 모르게 내성이 생긴 건지. 그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안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한참을 혼자 앓으면서도 '그래도'라고 며느리 도리를 챙겼다.


문제를 인지하고 난 이후, 우리 부부는 적절한 해법을 찾기 위해 수많은 대화를 해 왔다. 그 사이에도 새로운 사건들은 생겨났고 남편의 티미한 대응이 사건에 공헌하기도 해, 때론 언성이 높아지고 며칠 동안 말을 섞지 않은 날도 있다. 그래도 그런 과정을 통해 남편도 조금은 내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가장 온건한 해결책이라 생각한 '덜 만나는 것'에도 협조했다.


"最近、俺にもちょっと見えてきたんだ。(요즘 나한테도 좀 보이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는 최근, 원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있었음을 고백했다. 얼마 전, 동생 부부(아마도)가 본가에 왔다 가면서 있던 일이 계기가 된 듯했다.


처음엔 그냥 흘려듣던 이야기, 그다음은 쟤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지 하던 이야기들이 떠올라 아아, 이런 걸 말하고 있는 거였구나라고 느껴졌다 한다. 아주 좋은 가족이라곤 못해도 나쁜 가족은 아니라 생각해 왔는데, 그렇다고 그냥 좋은 가족이라고 수도 없을 것 같다고,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고, 형제 위계질서도 없이, 모두가 친구 감각으로 각자 자기들 좋을 대로만 하며 사는 것 같다고, 아마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도 우리 둘 뿐일 거라며 허탈하게 웃는 그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나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이제 더는 원치 않는 만남도, 깍듯이 차리는 예의도 필요 없다며, 저쪽에서 연락이 와도 말 섞을 필요 없이 전부 자신에게 돌리라고 했다. 불필요한 접점을 최대한 없애는 것은 최선의 방어가 될 거란 합의점은 쉽게 찾았다. 


하지만 그게 최상의 대책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또 내가 남편과 같은 동그라미 안에 있는 한, 변하지 않을 그들의 날갯짓은 내게도 파도가 되어 날아들 것이다. 그렇다고 남편에게도 그들을 보지 말고 살라 강요할 수는 없다. 관계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해도, 오랜 시간 착한 아들 착한 오빠 롤을 강요당한 그가 그 굴레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순진한 가족애도 있을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도 모르게 가져버리고 만 을의 마인드를 버리는 것 아닐까. 시월드와 며느리라는 전통적 관계에 갇혀 브레이크를 밟던 나.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어디서 뚝 떨어진 종속물의 종속물 정도로 쉽게 여기는 이들에게 나 역시 EASY하게 싫다 소리 못할 이유는 없었다. 참고 만날 필요도 없지만 굳이 만나야 한다면 참을 필요도 없었다. 갈등은 따라붙겠지만 판을 흔들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한때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는 집'을 꿈꾸던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아, 아니지. 진짜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간 '관계는 박수와도 같다'라고 생각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인간관계 역시 서로 노력을 해야 성립되니까. 하지만 관계를 박수에 비유한다면, 그냥 박수가 아니라 내 손바닥과 남의 손바닥으로 소리를 내려하는 것이라 하는 쪽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내 손이 아니니 더 어렵다. 애초에 손뼉 칠 마음이 없는 손이라면 박수는 고사하고 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그런데도 애써 그 손과 박수를 치려는 시도는, 이제 그만할 생각이다.


잘해보려는 노력, 좋게 보이고 싶은 노력, 싫어도 참고 만나서 하하 호호 웃고 눈치를 보는 노력.  


그런 노력은 나와 박수를 쳐주려 하는 이들에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도 굳이 노력을 해야 한다면, 음,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노력을 해야겠다.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이들에겐 그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노력 정도가 딱 맞는 옷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접착제로 붙인 갈빗살 같은, 본질은 인공적이고 불안정한 관계.


그건 그럴만해서 저절로 붙어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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