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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는 어디로 가는가

by 김이람 Mar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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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울리지 않는 핸드폰에 뭔가 기별이 왔을 때는 십중팔구 방재정보 어플이다. 천재지변과 지역 내 치안 정보를 알려주는데 대부분 인근 어디에 강도가 들었으니 문단속 잘 하라던가, 바바리맨이 나타났으니 주의하라던가 하는, 공익성 높고 흉흉한 것들 뿐이다.


지난 금요일에는 아침부터 핸드폰이 반짝거렸다. '범죄 및 사고에 관한 주의환기'라는 제목에 으이그 또 어떤 변태새끼가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하며 열기 버튼을 눌렀다. 글자를 쫓던 눈이 크게 떠졌다.


<원숭이 출몰>


'그 원숭이'가 틀림없다.




'그 원숭이'가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작년 4월. 왼쪽 앞다리, 정확히는 왼손이 없는 원숭이가 후쿠시마 현 내를 돌아다닌다 했다. 산에서 무리 지어 사는 원숭이가 왜 혼자 마을로 내려왔을까. 손은 또 어쩌다 그리 되었을까. 수수께끼 투성이었지만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그 원숭이의 방랑벽이었다. 한 군데서 질펀히 머무르지 못하고 토치기와 도쿄를 거쳐, 시즈오카에서까지 목격된 그 원숭이는 3월 초부터는 돌연 북진을 시작했다. 8일 오케가와, 10일엔 교다, 이 페이스라면 며칠 뒤에는 우리 집 뒤 작은 배추밭에 녀석이 짠 나타나지 않을까. 그리고 싱싱한 배춧잎을 양볼 가득 뜯어먹는 것을 베란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는 나를 상상했다.


그랬던 게 불과 이틀 전인데 벌써 우리 시 어귀에. 그리고 다다음 날 아침, 드디어 우리 동네 근처에서 목격되었다는 알람이 왔다. 아침부터 새들이 꺅꺅 대더니 혹시? 얼른 베란다의 커튼을 열어 (남의) 배추밭을 바라보았지만 부슬비를 맞아가며 처연히 주저앉은 배추들 사이에 내가 기대하던 원숭이의 먹방은 없었다. 원숭이에게 배추는 그리 매력적인 먹잇감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뒤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비가 더 내리기 전에 일주일치 식량을 조달하려고 나간 것이지만 원숭이가 목격되었다던 위치와 마트까지의 길이 겹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부러 길을 돌아 이쯤에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렸지만 쉽게 만날 수 있으면 슈퍼스타가 아니다. 그렇게 사라져 간 나의 슈퍼스타. 그가 곧 큰 난관에 봉착했음은 치안알람을 통해 전달되었다. 북진을 계속하던 원숭이는 강에 가로막혔다. 강을 건너면 다른 현으로 나갈 수 있지만 다리로 가려면 트럭이 씽씽 달리는 길을 가로질러야 했다. 원숭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못하겠으면 차라리 우리 집 (뒤 남의) 배추밭에 와서 배추라도 먹으면서 생각해. 두 근 반 세 근 반 나는 원숭이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그러다 화수 이틀 동안 큰 눈이 내리며 원숭이의 목격정보가 뚝 멈추었다. 날도 추운데 눈에 젖은 털을 녹일만한 곳은 있을까. 뭐 먹을 것도 없을 텐데. 원숭이 걱정하느라 남편이 내복을 입고 나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한동안 멈추었던 원숭이 알람이 재개된 것은 목요일 아침. 강을 피해 남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한 듯했다. 구글맵으로 장소를 확인해보니 나의 슈퍼스타는 난관에 이어 거대한 갈림길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다리, 곧장 또는 왼쪽으로 가면 큰 산이 나온다.


원숭이는 어떤 선택을 할까. 다리를 건너면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고, 산으로 들어가면 사람들과의 접점 없이 원숭이다운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어느 것이 원숭이에게 더 행복한 삶일까. 


여전히 그 원숭이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긴 거리를 걸어왔는지, 어디로 갈 생각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목격자들이 찍은 동영상에는 남의 집 정원에 들어가 공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풀씨를 주워 먹거나 세발로 절룩절룩 걷고 있었다. 그렇게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온 원숭이다. 긴 여정 속에서 이미 충분히 많은 산을 보아왔을 것임에도 산이 아닌 도시를 택한 이 특이한 원숭이가 찾고 있는 것은 어쩌면 산에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해 온 것 역시, 원숭이 나름의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큰길과 다리에 가로막혀 길을 잃고서도, 잠시 숨을 고른 뒤 씩씩하게 방향을 바꿔 다시 걷는 그 원숭이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벽에 부딪혀도 다시 일어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참 많이 닮아있기 때문일까. 나는 이 원숭이가 영 신경 쓰인다.

 

그래서 나는 원숭이가 용기를 내어 다리를 선택했으면 좋겠다. 차들이 지날 때마다 웅웅 하는 진동이 전해져 다리를 건너는 내내 몸이 떨리겠지만, 강을 건너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숭이의 길에는 이제까지와 비슷한 풍경들이 펼쳐질 것이고 모험은 계속 될 것이다. 원숭이와 만난 운 좋은 사람들은 슈퍼스타와의 조우를 영상으로 남기며 기쁨을 감추지 않을 것이고, 방재어플은 외출 시에 주위를 경계하고 야생동물과 마주쳤을 땐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알림을 계속해서 보내오겠지. 우리 집에 서식하는 나는 비록 그 원숭이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방재어플의 설정 지역을 바꾸어 가며 멀리서나마 원숭이의 행보를 헤아리고 응원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하게 오늘도 살아남았구나. 추운데 먹을 건 있나. 안도와 걱정을 번갈아 하면서. 지자체들이 원숭이를 포획할 계획인지, 아니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그냥 놓아둘 생각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짠하고 용감한 원숭이가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계속해서 무사히 걸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내가 그렇게 빌어왔고, 빌어져 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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