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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Jan 04. 2024

끝을 봐야 버리는 이 미련함

미련가져 머할라꼬

 1년 전 겨울로 기억한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집안 습도계는 습도 17%를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빨래를 방 안에 널어놓아도 습도 19-20% 정도에서 멈추어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건조함에 연신 기침이 나왔고 집안 이곳저곳을 다 뒤집어 가습기를 찾기 시작했다. 

"이사 올 때 버렸나?"


가습기는 끝내 집안에서 나타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인터넷 쇼핑을 켜고 구입을 위한 검색에 돌입했다. 

엄청나게 많은 종류에 놀라고 높은 가격에  또 한 번 놀랐다. 5-6만 원 정도를 예상한 나는, 20-30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가습기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비싼 가습기일수록 왜 이렇게 후기가 좋은 건지 나도 모르게 자꾸 장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의 끈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포화상태인 장바구니를 외면하고 적당한 가격과 높은 평점인 제품을 골라 결제까지 일사천리로 마쳤다. 

역시 빠른 배송이 최고라며 다음날 우리 집에 도착한 새 전기제품을 환영했다.  3단 서랍장 위에 가습기를 올려놓고 분무량을 올려 수분을 가득 머금은 공기 속에서 목이 아프지 않은 삼일을 보낼 수 있었다. 


4일째 되던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지옥을 보았다.

서랍장에서 비 오듯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머야!"

선반 위에 있던 책들은 밤새 가습기에서 새어 나온 물에  말 그대로 스펀지가 물 머금듯 물 먹은 책이 되었다. 전날보다 두 배는 커져 배불뚝이가 되어 있었다.

"오 마이 갓!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도 있는데!"

선반 위에 있는 물건들을 바닥으로 내리고 선반 위 유리를 들어 스며들어 간 물을 닦았다. 제일 먼저 책이 걱정되었다. 젖은 책 말리는 법을 검색해 보니 냉동실에 얼렸다가 말리면 책이 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로 행동에 옮겼다.


1단계 : 책들을 냉동실에 넣고 얼림


2단계: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책을 펼쳐 놓음


다음날 보면 펼쳐놓은 페이지만 말라있음


3단계 : 책장을 3-5장 넘겨 펼쳐놓음


다음날 보면 펼쳐놓은 페이지만 말라있음


2단계 - 3단계의 무한 반복


보아하니 책에 새겨지는 파도 같은 갈색 물얼룩과 우굴쭈굴해지는 책의 울음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내 얼굴도 함께 우굴쭈굴 울고 있었다. 흐억)


'아..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네'

도서관에 전화를 걸어 책이 물에 젖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빌린 책을 어떻게 배상해야 하는지 방법을 물었다. 일련번호가 똑같은 책을 구입하여 반납하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당장 인터넷 서점에서 새 책을 구입했고 배송이 온 날 바로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그렇게 물폭탄 맞은 대출 도서 수난 사태는 끝맺음을 하였다. 


도대체  외관으로 보기에 멀쩡한 가습기가 왜 물이 샌 것인지 궁금했다. 구입한 사이트에 들어가 서비스 센터 번호를 찾다 보니 Q&A에 [가습기에서 물이 샐 경우의 체크 포인트]가 있었다.

'나만 이런 건 아니었나 보네'


제품 밑에 수건을 깔면 안 되는 거야. 

수위조절기에 붙어 있는 포장재 벗겨보렴

물통 조립 꼼꼼히 잘하렴

분무관에 물을 넣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해


딱히 내가 어긴 건 없는 것 같았고 조심해서 쓰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내 마음과 달리 상황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 후로 2번인가 물이 더 흘러넘쳤고 나의 긍정적인 회로가 시간을 끄는 동안 교환, 반품이 가능한 1달을 넘겨 작은 희망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봄이 되었고, 가습기는 창고 속으로 들어갔다. 


봄 - 여름-가을이 지나 다시 습도가 떨어지는 추운 날씨는 돌아왔고 나는 창고 속 가습기를 꺼냈다. 

지난겨울의 일을 잊지 않았기에 조심해서 쓰겠다는 궁여지책으로 가습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주변에 안전 가드처럼 수건을 둥글게 둘렀다.

"이러면 물이 새더라도 흐르는 일은 없겠지"


'이렇게 쓸만한 것 버릴뻔했네'하다가 혹시나 불안해지면 '물이 새면 새로 사면되지'하는 마음이었다.

폭력을 휘두르는 연인을 보며 '원래는 착한 사람인데 가끔 사람을 힘들게 한다며 내일은 안 그러겠지. 앞으로는 바뀌겠지.' 하는 현실 회피와 억측과 어두운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드디어 가습기와의 끝을 보게 된 사건이 터지고 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가습기 물이 샜는지 안 샜는지 바닥을 만져보는 게 일상이 되었던 나는 그날도 눈 뜨자마자 자가 누수체크를 했다. 흠뻑 젖은 수건을 확인하고 

'어휴.. 오늘.. 또'

혼잣말을 뱉으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건을 들고 잽싸게 화장실로 뛰었다. 새 걸레를 들고 와서 바닥을 닦으려는데 

이런...

마루가 들떴다. 

내 마음도 마루처럼 뒤틀어졌다. 

이 눔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생겼다.


이렇게 끝을 봐야만 속이 후련했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기까지 질질 끌고 온 미련한 나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더 이상 변명 거리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가습기를 들고나가 수거함으로 직행했다. 


1월 1일이었다. 


미련하게 버리지 못하고 한 해를 넘기면서까지 끌고 온 가습기, 인연을 끈 지 못하는 사람, 상처받은 마음도 다 수거함에 쑤셔 넣었다.

올해는 미련스럽지 않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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