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냥냐앙~ 아앙앙~”
이 무슨 앙탈하는 소리란 말인가. 발원지점으로 짐작되는 곳은 에어컨 실외기가 놓인 베란다였다.
“나루야, 무슨 일이야?”
다급히 가보니 실외기 위에 능청스럽게 앉은 비둘기 한 마리 탓에 애가 닳은 나루가 내는 고통의 소리였다. 얼마나 답답하고 약이 올랐던지 그 소리에서 몸부림 같은 것을 느낄 정도였다.
‘새는 유리를 보지 못한다는데 저 비둘기는 뭐여? 저건 새가 아닐지도 몰라. 이무기가 둔갑이라도 했나?’ 한쪽 뺨을 고양이에게 똑바로 향하고 눈깜빡임조차 없이 천적을 직시하고 있잖은가. 베란다 창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하는 나루를 보자니 순간 마음이 몹시 알알했다. 어쩌다 실수로 아파트 현관을 나섰다가 낯선 공간감에 압도돼 고장나버린 나루를 웃기다며 낄낄댔던 때와는 거리가 먼 기분이었다. 본성을 어설프게 거세시킨 삶의 방식이 그에게 미치는 영향을 한두 번은 웃으며 회피한다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계속 쌓여서 언젠가 녀석이 너무 짠해지면 나는 미안해서 어쩌나.
냥이를 데려온 것은 구원투수가 필요해서였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큰아들이 컴퓨터 게임에만 푹 빠져있었다. 적당히 못 본 척 넘어가며 지혜로운 엄마라 스스로를 추키다가 맞은 위기였다. 12살 무렵 마인크레프트를 시작한 큰아들은 5~6학년을 지나며 나에게 미리 ‘다녀오겠다’ 알리고 두 시간씩 PC방에서 놀다오곤 했다. 따라다니며 말릴 수 없는 바에야 알아서 그 만큼씩만 해준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부모에게 거짓말하고도 다니지 않는가. 그러나 녀석은 내가 새로 시작한 직장생활에 적응하는 사이 낮시간에 무한히 자유로워져서 게임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뒤늦게 이래저래 어르고 달래는 나에게 어느날 녀석은 말했다. ‘헛소리’한다고. 대충격이었다. 아이는 친구랑 동생을 데리고 PC방에 갔더라도 동생과 제 친구가 돌아오고 해가 산을 넘어간 지 한참이 되도록 집에 오지 않기 일쑤였다. 어느덧 그는 오로지 게임과만 시간을 보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청소년이 돼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교감을 나눌 온기를 가진 존재로서 고양이가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불현듯 떠오른 고양이의 필요였다.
겨우 생후 3주만에 생모에게서 떨려 우리집에 온 고양이는 그야말로 요물이었다. 큰아이의 게임 의존을 어찌 다뤄야 할지 조언을 구할 상담소 전화를 얼쩡거리는 나와 달리 남편은 태평했다. 아니 당시 내 보기에 그는 자기 문제 외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헛소리 한다’는 아이의 반격에 위축돼 이 문제를 혼자서 부딪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상의 좀 하자며 집요하게 그를 붙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들볶아봐야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서로에게 피로감과 실망이 깊어갔다. 나는 애써 설명하고 답을 얻을 대상이 아니라서 고양이가 부담 없었다. 남편은 말이 없고 요구도 없는 고양이라 편하다고 했다. 상심해서 외로워진 내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있으면 냥이는 어느새 곁으로 와서 제 살을 붙였다. 그 조그만 훈기가 나를 한없이 위로해 주었다. 고양이가 무섭고 꺼림찍하던 내 마음 벽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나에게 가까워졌듯이 우리 고양이 나루는 큰아들에게도 가까워졌다. 처음엔 무생물 취급조차 해주지 않던 아이가 어느새 나루가 다가오면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가끔 마음이 내키면 사료를 챙겨주고 장난감으로 놀려도 주었다. 고양이를 데려오자고 가장 강력히 주장한 이는 둘째 아들이었다. 초등 5학년이던 작은아들은 반 아이들로부터 은따를 겪었다. 임시담임을 맡은 교사를 친구들이 하도 기간제라고 무시해서 한 친구랑 호기롭게 “그러면 안돼.”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둘은 방과 후 놀이터 미끄럼틀에 앉아 함께 하늘을 올려보며 “우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하고 한숨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고양이가 새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반 아이들이 나루를 만져보려고 우리집에 찾아오면서 모든 문제가 사르르 사라졌다.
나는 나루가 너무나 신통하고 기특했다. 책을 읽고 팟캐스트를 찾아 들으며 고양이 돌보는 법을 공부했다. 집사 정서에 조금씩 공감대를 넓혀갔다. 그리 고마운 존재인데, 우리에겐 참 좋은 삶이나 저 나루에게도 그럴까. ‘비둘기, 그림의 떡’ 사건은 나에게 문득 그 의구심을 일으켰다. 명절연휴에 혼자 둘 수 없어 데려온 나루를 보고 시골 시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셨다. “온 집을 다 긁어 놓을 텐데, 냄새도 날 텐데 도시 아파트에서 저를 어쩌나...” 시골에 데려다 놓으라고 누차례 말씀하셨다. 그 무렵 우리 가족도 사춘기를 맞은 두 소년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고자 이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고양이를 키워봤던 남편은 모래도 사야하고 먹다 남긴 음식이 아니라 사료를 먹이는 사육방식에 꽤 회의를 갖고 있었다. 새로 이사할 곳에서는 고양이 냄새가 안 났으면 좋겠다, 고양이는 고양이답게 살아야 한다며 나를 설득했다. 나는 미안함을 버겁게 느끼고 있었으므로 나루를 위한다는 핑계로 그의 이삿짐을 쌌다. 나루는 시댁 안방 장롱 위에서 3일간 두문불출하다가 우리의 다음 방문 즈음에는 당당한 외출냥이가 돼있었다. 쥐를 잡아 아버님 앞에 내려놓기도 하며 시골식구로서 제 몫을 했다. 잔정 표현이 거의 없으신 어머님 대신 아버님과 소울메이트가 되어, 한쪽은 진드기를 잡아주고 다른 한쪽은 골목 어귀까지 마중과 배웅을 했다.
일 년에 파리 몇 마리 들어오지 않는 도시 아파트에 갇힌 지루한 삶을 줘서 미안했다면, 시골집에 떠넘겼다는 사실은 내게 다른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내가 고양이 입양한 줄을 알았던 사람들이 나루의 안부를 물으면 ‘더 좋은 환경에 데려다 주었다.’고 답하는 내 뻔뻔함이 부끄러웠다. 시댁에 갈 때마다 ‘냐앙’하며 정답게 다가오는 나루를 나는 도저히 마주보기 거북했다. 무슨 염치로 반가운 척 다정한 척한단 말인가. 끝까지 책임지지도 않은 주제에. 나는 재회 선물로 가져간 츄르를 적당히 주고나면 더 이상 손길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반면 남편은 칠월칠석 견우가 직녀 만난 듯 애틋하게 굴었다. 세상 그런 애묘가가 없었다. 내 몫까지 잘 해주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대단한 변죽이다 싶었다. 남편은 나에게 말했다. 나루 입장에서 보라고. 반가운 가족이 오랜만에 왔는데 자꾸 외면하면 아무것도 알 길 없는 나루가 얼마나 서운하겠느냐고. 그냥 예뻐해 주라고. 나는 아무래도 겁쟁이다. 나루가 서운해하는 것보다 내가 진실하지 못하다는 자각을 직면하기가 더 어렵다. 고작 고양이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 고롱고롱 소릴 들어주고 따스하게 바라보며 눈뽀뽀 해주면 충분할 일인데... 못된 사람에게라면 까짓것 기만해 주겠다. 하지만 진실한 고양이가 아닌가. 그 고양이를 속이기까지 하기란 퍽 괴로웠다. 역시 나는 내가 더 중요한 것이다.
고양이의 본성에 생각이 미쳤듯이 나다움에 생각이 꽂힌다. 나의 본성. 후천적 삶으로는 이 이상 수정하기 까다로운 나란 사람의 마음 생김새. 그 무늬와 빛깔과 질감과 무르기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새롭게 정의할 유연함이, 혹은 나를 설득할 만큼의 재주가 지금 나에겐 모자라다. 나는 여전히 나루를 차갑게 대한다. 내가 그 옆에 가서 살지 않는 한 앞으로도 어쩌기가 자신 없다. 하지만 그래도 복잡하지 않고 가뿐한 남편이 나루를 사랑해주니 나 하나쯤 몫을 하지 않는다고 나루가 불행하지는 않으리라. 마찬가지로 나 하나쯤 아집스럽고 옹졸해도 괜찮지 않을까? 모두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하기보다 나를 보호하겠다고 ‘나다움’이니 뭐니를 고집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