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부터 다섯시간, 스물일곱번째와 스물여덟번째 편지
스물일곱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요즘엔 꽤나 부지런히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잡념도 사라진 편인 것 같아요.
일기를 쓸 때 성의가 없어졌거든요. 원래 생각이 많거나 근심이 깊은 날엔 일기장에 주절주절 별의별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편인데, 요즘은 일기를 쓰는게 너무 귀찮다고 느껴져요. 너무 행복하지도 너무 슬프지도 않은 날들이라 그런지 일기장에 도통 손이 가질 않네요.
인간은 일기장에마저도 거짓말을 하며 풍부하게 하루의 일을 꾸며쓴다고들 하지만, 전 이제 거짓말을 할 기력조차도 없나봐요. 요즘은 매일 아침 달력에서 오늘의 날짜를 찾은 뒤 볼펜으로 엑스자를 긋고 있습니다. 이전까진 하루의 마무리에서 일기를 쓰며 하루하루를 세어나갔다면, 이젠 아침의 시작에서 하루를 그어내면서 하루하루를 세어나가고 있는 셈이죠. 뭐 제가 지금 가장 바라고 있는 건 12월의 탈출이니까요. 12월이 되면 다시 어떻게든 생기를 찾아나가길 바라요.
스페인어 배우기를 꽤나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내심 혹여나 작심삼일로 끝나게 될까봐 스스로가 두려웠는데, 그래도 꾸준히 지속하는 걸 보니 기특하네요. 그런데 이 이상한 마음 뭔지 아세요? 저는 원래 이탈리아어가 하고싶었어요. 그런데 워낙 이탈리아어 인프라가 아직 국내에서 안 갖추어졌길래 스페인어 먼저 건드려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거든요. 그렇다보니까 뭐랄까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으면서 애꿎은 사람과의 연애를 시작한 느낌이에요. 스어에 점점 물들어가고 분명 스어가 좋은 것도 맞는데, 뭐랄까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그런 이상하고 가녀린 마음. 같은 라틴어 계열이라 그런지 확실히 겹치는 단어는 많은 거 같아요. 전부터 봐오던 이탈리아 넷플릭스 시리즈 드라마가 있는데, 최근에 이어서 보니까 단어가 몇개 들리더라고요. 하. 내가 얼른 널 찾으러갈게 이탈리아어야.
위로와 사랑을 여기에 두고,
2022년 10월 18일 PM 5:15
스물여덟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꿈을 꿨습니다. 요즘은 무아지경으로 수면을 푹 즐기는 편이라 정말 간만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은 무의식의 자아를 투영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도 몰랐던 저의 속내를 자주 발견하게끔 합니다. 잊고 있던, 잠궈두었던 마음이 수면위로 가까이 떠올랐습니다. 그니까 이건 저도 제게 비밀로 해두었던 일이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다만 쌔까맣게 잊고있던 일이 꿈을 통해서 상기되니까 기분이 싱숭생숭하네요. 이렇게 글자로 적어내려놓고 저는 다시 평소처럼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꿈은 하루 지나면 가물가물해지곤 하잖아요.
한때는 수면중의 꿈이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뇌과학에 처음 관심이 갔던 것도 고등학교때 뇌파와 명상을 처음 접한 이후인데, 수면중에 나오는 강한 뇌파 신호와 꿈 사이의 연관성이 궁금했습니다. 애석하게도 호기심의 깊이와 학구열의 깊이가 서로 상응하지 않아 전 그 길을 택하지 않았지만, 아무렴 아직까지도 제겐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이 있으신가요? 혹시 당신이 기억하는 가장 최초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또렷이 기억나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이 꿈은 아마 “몬스터주식회사”의 영향을 거하게 받았던 것 같은데, 7살보다 더 어릴때 쯤, 외갓집에서 잠든 사이에 꾼 꿈입니다. 몬스터주식회사의 설리 같은 털복숭이 괴물이 저를 찾으러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전 아마 이불과 하나가 되어있고, 영혼은 유체이탈하여 제 3자의 시선으로 드론처럼 이 광경을 구경했던 것 같아요. 공간적 배경은 외갓집 아파트였고, 인터폰으로 괴물이 인사하던 모습으로 시작했는데, 그게 아직도 생경하게 기억에 남네요.
그밖에도 엄청 큰 병원의 지하로 한참 내려가는 엘레베이터를 탄 꿈도 있었어요. 이건 제가 겪었던 가장 무서운 꿈이기도 해요. 한없이 내려가는 (정확히 말하면 추락하는) 엘레베이터 안에 제가 타 있었고, 또 제3자의 시선으로 모든걸 전지적인 시점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와중에 당시에 좀비영화를 너무 인상깊게 봤는지, 지하의 층마다 그 곳에 있던 환자들은 전부 좀비가 되어 있어서 저를 향해 꾸준히 달려들었죠. 다시 상기해도 아찔한 꿈이었네요.
요즘은 무엇이 저의 우선적인 가치관인지, 나의 우선순위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중이에요. 스스로 상대적으로 야망없고,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무언가의 커리어를 이루고 인정받고, 또 그런 인정받음으로 인해 여러 부업들을 펼쳐서 부수입까지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더라고요.
저는 제게 자유가 우선순위라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해외를 떠돌아다니며 디지털노마드 생활만으로 돈벌이를 유지하는 사람의 삶을 엿보게 되었급니다. 그 분은 IT업계의 프로젝트매니저로 일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UX,UI 기타등등의 일로 여행을 하면서 꾸준히 수입을 얻고 있었어요. 자유를 갈망하던 저는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았어요. 세상에, 커리어를 쌓아서 무언가 내가 ‘할수있는’ 일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정도가 되면 명함도 파고, 해외 프리랜서 사이트에 스스로의 공고를 올려서 어디서든지 일을 할 수가, 돈을 벌 수가 있구나, 그러면서도 떠돌아다닐순 잇는거구나.
집시같이 살고싶어서 진짜 집시가 되려던 저를 아차싶게 했죠. 그래, 나의 경쟁력은 무엇이 있지? 자유를 원한다해서 거지가 되고싶던 건 아니니까,,, 자유를 원한다고 해서 돈이 탐나지 않은 건 아니니까,,, 자유를 원하다고 해서 인정받기 싫은 건 아니니깐,,
그간 떠돌이여행자, 가이드, 등등 다소 확실한 스킬 없는 일들만이 유일한 자유의 대체제라고 떠올리다가 크게 한방 먹었네요. 나의 경쟁력을 어떻게 길러내야할까요. 일단 언어부터 손보는게,,
오늘은 제 인턴생활의 인터미션 날입니다. 어제까지 30번의 출근을 했고 내일부터 30번의 출근이 남았으니 정확히 정가운데에 서있는 셈입니다. 남은 30번동안 일하고 있는 마케팅 직무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들을 최대한 흡수하려고 합니다. 남은 기간동안 구글애널리틱스 자격증을 후루룩 국수먹듯이 따내려고요. 뭐, 흥미와 적성이 끝내주게 있는 분야가 아니라서 제 앞길로 삼진 않을 것 갗지만, 그래도 제가 3개월이나 투자한 시간이니 건져가는 결과가 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무래도 듣고있던 스페인어 강좌도 완강하고 싶네요. 하루하루 해야할 공부들이 있다는게 골치 아프면서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냥 평생 학생이나 하고싶네요.
뜻밖의 동기부여를 잔뜩 받은 날입니다.
절반밖에 안남았으면서 절반이나 남았습니다. 한만큼만, 한것보단 더 열심히 해보도록 하죠.
위로와 사랑을 여기에 두고,
2022년 10월 19일 PM 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