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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린 꽃들
Dec 22. 2022
계절을 타고 싶다, 맘껏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계절은 여름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던 시기로 기억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해마다 여름이 기다려지곤 했다. 파란 바다와 맑은 하늘, 해변 위를 나는 갈매기들과 푸른 나무들, 나는 이런 풍경을 상상하며 빨리 여름이 오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막상 여름이 돼도 부모님의 생업 때문에 우리 가족은 바다는커녕 가까운 계곡도 찾지 못한 채, 선풍기로 더위를 버티며 여름을 보냈다.
여름이 바랐던 대로 흘러간 적이 없어서일까?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으로 바뀌게 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여의도로 놀러 가 진짜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부터였다. 물론 그전에도 많은 꽃들을 봐왔지만, 그날 봄햇살에 흩날리며 온 세상을 파스텔톤으로 색칠하던 벚꽃은 나에게 처음 느끼는 감정을 선사했다. 설렘을 베이스로 한 줌의 수줍음과 약간의 애틋함을 넣은 감정이랄까. 그 뒤로 해마다 때가 되면 벚꽃을 보기 위해 소풍을 떠났다 — 그다지 돈도 안 든다.
대학생이 돼서도 여전히 봄을 좋아했지만, 여자 친구를 사귀면서 봄은 가을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타이틀을 내주게 된다. 사람들이 말하듯 정말로 봄이 너무 짧아진 모양인지, 꽃이 만개하는 며칠을 빼면 데이트를 하기엔 후텁지근한 날이 많았다. 그에 반해 가을은 꽤 긴 시간 동안 파란 하늘과 상쾌한 공기를 안정적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둘이 손잡고 돌아다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겨울은 한 번도 나의 계절 타이틀을 거머쥔 적이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느라 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을 가망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언제인가? 가족과 피서를 떠나지 못했던 여름? 아니면 이제는 연락이 끊긴 친구들과 꽃구경을 떠났던 봄? 그것도 아니라면 매듭 없이 끝난 연애를 떠올리게 하는 가을인가?
이제는 좋아하는 계절 따위는 없다. 여름이면 더워서 싫고, 겨울이면 추워서 싫다. 언제부터 꽃가루 알레르기가 생겨 봄이 찾아와도 야외활동이 꺼려진다. 가을이면 해가 짧아져서 아쉽다. 이제 겨우 서른 중반에 특별히 아픈 데도 없지만, 어릴 때 넘쳐나던 감정과 에너지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대신 경험이 쌓여서 내 육신의 안위를 우선하게 된 거라 할 수도 있겠다. 우산이 있어도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라면 비에 흠뻑 젖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나는 이제 외출할 땐 꼭 날씨를 확인한다.
내가 계절을 타게 만들던 어떤 호르몬의 열차가 엔진을 멈춰버린 탓일 수도 있고, 이젠 내가 너무 현실적으로 변한 것일 수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든 가끔은 예전처럼 계절을 느끼고 싶다. 봄의 야생화를 보며 진짜 꽃을 느끼고, 여름 비를 맞으며 쫄딱 젖어보고 싶고, 가을 단풍에 아련함을 느끼다 겨울 눈으로 위로를 받고 싶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잠시 꺼둔 채, 오직 내 감성의 만족을 위하여. 마음이란 휘둘려선 안 되지만 가끔은 흔들려도 괜찮은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