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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ry Nov 06. 2023

독불장군은 환영받지 못하는 법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 건 아닐까.

고백하자면 어릴 때 잘난 체를 좀 했던 편이다.  잘난 체의 기원을 돌아보자면 아무래도 부모님 탓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부모님은 자식의 변하지 않는 오랜 팬이다. 내 부모님도 어린 시절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의 전폭적인 응원단장이었다. 그래서 부모님 앞에서는 눈치 보지 않고 잘난 체를 맘껏 했던 것 같고,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도 때로는 오지랖을 부려가며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세상 물정을 알아가면서 나대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어릴 때처럼 계속 깝죽거리기에는 세상에는 잘난 사람들이 무척 많았던 것이다. 어쭙잖게 설치다가 역풍 맞는 본보기도 여러 번 목격하면서 자연스럽게 겸양의 미덕을 알아가고, 지금은 누구보다 자중하면서 살고 있다. 아무리 모나고 튀던 사람도 나이가 들다 보면 대체로 이런 자중자애(自重自愛) 모드로 변환되기 마련인데 가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내 독서취향은 30대까지는 한국 현대소설을 많이 읽었다.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나라에서 내가 겪었음직한 이야기가 술술 읽혔기 때문이다. 고전소설을 읽기도 하고, 읽으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100년 전 200년 전 이야기들이 별로 와닿지도 않고, 문장도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하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중년에 접어들자 이상하게도 그동안 재밌게 읽어왔던 한국 현대소설에 흥미가 뚝 떨어졌고, 거리감이 느껴졌던 18세기, 19세기 영미소설들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예전과 달리 술술 읽혀서 최근 몇 년간은 옛날 소설만 읽고 있다. 


영미 소설을 읽을 때 제일 신경 쓰는 것은 아무래도 번역이고, 가장 정확한 번역본을 고르기 위해 제일 쉬운 선택은 공신력 있는 출판사 책이거나 가장 최근 출판된 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최신판은 과거의 오역이나 잘못을 바로잡았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주에 며칠 만에 읽은 19세기 말 영국 소설은 2022년에 출간된 것으로 골라서 읽었는데 무척 쉽고 재미있었다. 소설을 읽고 역자해설까지 빠짐없이 다 읽는 편인데 본 소설이 280쪽 분량에 작가 연보는 빠져있고, 역자 해설이 50쪽 이상이나 되는 것을 보고 번역가가 뭐 이리 할 말이 많나 궁금증이 생겼다.  


역자 해설을 다 읽고 충실한 번역을 위해 애쓴 노고는 인정할 만 하지만 다른 번역판의 문제를 일일이 지적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건 좀 과해 보였다.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50쪽을 할애해서 다른 사람의 성과를 평가절하하는 걸 보니 잘난 체 가득한 번역에 의문과 호기심이 발동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번역이길래 이 정도로 자의식 과잉인 건가 싶어 번역가에 대해 검색하다 보니 10여 년 전에 번역 논쟁으로 이슈가 된 이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출판사 정보를 찬찬히 보니 번역가가 출판사 대표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하, 치열한 출판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잘난 체’를 선택했구나.  생존을 위해 남을 헐뜯는 전략을 선택한 것 같은데 주로 예능 프로그램에서 많이 보던 걸 출판시장에서 보니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런데 남을 깎아내리고 망신을 줘서 웃기는 사람들도 정작 자기가 똑같이 당하면 정색을 하는 모습을 보여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때가 있다. 


나만이 선(善)이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전부 악(惡)이라는 사고체계로 무장하면 대중에게 환영받을 수 있을까? 출판 공룡 수준의 거대 업체들과 대적하기에 중소 업체들이 역부족이라는 것은 십분 이해하지만 아무리 호구지책(糊口之策)이라고 해도 상대를 흠집 내고 깔아뭉개는 행태는 좋게 봐주기 어렵다.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 패착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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