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거나 긴박하지 않아서 충격적인 정치 드라마
90년대 대단했던 명배우들이 너무 늙어서(?) 출연한 작품들은 보지 않는 편이다. 차마, 못 본다는 것이 더 가깝다. 내가 늙는 것도 서러운데 별처럼 빛나던 그들의 반짝임이 사라지다 못해 녹슨 배우를 보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 서글픔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배우’를 뛰어넘어 ‘장르’가 되어버린 존재들은 더욱 그렇다. 잭 니콜슨, 앤서니 홉킨스, 더스틴 호프만 같은 배우들 말이다.
넷플릭스 인트로 화면에서 주야장천 홍보하던 신작 <제로 데이>의 주인공은 더 이상 보여줄 게 있을까 싶은 배우 로버트 드 니로다. 1943년생이니 어느새 팔순을 훌쩍 넘겼다. 에너지 넘치던 로버트 드 니로의 늙고 쇠약해진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시청을 망설였는데 관람평을 보고 스포일러 당하기 전에 봐야겠다 싶어서 플레이를 누르고 말았다.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 전개로 지루함이 느껴질 즈음 드라마가 아닌 지난 석 달 동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을 떠올리게 할 만한 장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절로 몰입이 되었다. 빌 클린턴과 조 바이든의 개인사가 떠오르는 전직 대통령 조지 멀린 역으로 출연한 로버트 드 니로는 사이버 공격으로 충격에 빠진 미국을 안정시킬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혼란을 가져온 범죄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백악관과 보좌관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치 드라마 <웨스트 윙>, 종합병원 응급실 레지던트들의 이야기를 그린 의학 드라마 <ER>등을 비롯 수많은 TV 드라마를 만들었던 레슬리 링카 글래터는 <제로 데이>에서 윤리의식을 저버리고 권력만을 탐하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무리수로 인해 평범한 일상이 파괴되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로 데이>가 지루하고 기시감이 느껴졌다는 평이 쏟아지는 게 무리도 아닌 것이 연말연시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뉴스를 지속적으로 접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정권을 잡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국민들의 일상쯤은 가뿐히 짓밟아버리는 정치인, 성공가도를 달리다 못해 세상을 발아래 두고 싶어 하는 기업인, 대중을 끊임없이 선동하면서 돈벌이에만 급급한 언론인, 불안이 가중된 나머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희생양 삼기 위해 끝없이 공격하는 대중들… 최근 몇 달 동안 익숙하다 못해 지겹게 봐온 모습이 아니던가.
<제로 데이>는 정의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며 끝을 맺었다. 과연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권력자가 더 크고 강력한 권력을 얻기 위해 벌인 이 사태가 빠르고 원활하게 수습되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