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위해 준비했어.”의 함정 <아메리칸 머더 : 개비 페티토 살인사건>
넷플릭스 상위에 노출되는 <아메리칸 머더 : 개비 페티토 살인사건>을 처음 봤을 때 극영화인 줄 알았다. 영상에 등장하는 개비 페티토가 너무 예쁘고 발랄해서 오해를 한 것이다. 2021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 여성의 실종과 사망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개비 페티토 살인사건>은 약혼자에게 살해된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
개비 페티토는 고교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브라이언 론드리와 2019년 3월부터 사귀기 시작하였고, 연애 2년 만에 약혼 후 2021년 7월 캠핑카 여행을 떠난다. 틈틈이 영상을 찍어서 업로드하는 등 소소한 여행을 즐기던 중 여행을 떠난 지 41일 만인 8월 12일 브라이언에게 폭행을 당하는 모습을 본 사람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다. 경찰은 개비를 캠핑카에 남겨두고 브라이언을 호텔로 보내면서 며칠간 시간을 가지라고 권했지만(피해자를 호텔로 보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판단이다.) 그날 밤 개비와 브라이언은 다시 만나 여행을 재개한다. 이때 두 사람이 헤어졌다면 끔찍한 일은 피할 수 있었을까.
8월 27일 와이오밍주 마트 앞 CCTV에 두 사람의 모습이 찍힌 것을 마지막으로 개비는 사라지고, 가족과 친구들... 모든 연락이 끊긴다. 개비와 연락이 끊기고 열흘이 지나자 가족들은 결국 9월 11일 실종신고를 한다. 개비는 사라졌지만, 브라이언은 홀로 플로리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와 생활하고 있는 사실이 밝혀진다. 여행을 함께 떠난 커플 중 한 사람만이 돌아왔다면 의혹은 그 돌아온 사람에게 향하게 되고 경찰과 언론, 대중은 개비의 행방을 묻지만 브라이언과 그 가족들은 묵묵부답으로 대응한다.
9월 18일 경찰은 브라이언의 행방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른다. 개비의 행방을 아는 단 한 사람 브라이언마저 사라진 것이다. 브라이언이 사라진 후 9월 19일 와이오밍 국립공원에서 개비의 시신이 발견되고, 브라이언은 유력한 용의자로 확정된다. 개비의 시신이 발견된 지 한 달여 만인 10월 20일 브라이언을 찾아 나선 부모에 의해 그의 시신이 발견된다.
브라이언은 죽음을 선택한 순간에도 개비가 아파서 죽었다는 택도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은 유서를 남겼다. (개비의 사인은 교살로 이미 밝혀졌다.) 두 사람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둘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구체적인 정황은 영원히 묻히게 되었지만 브라이언이 개비를 살해했다는 사실만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연애 초창기 개비에게 첫눈에 반한 브라이언은 상당히 다정했고, 선물공세가 이어졌다고 한다. 고작 스물두 살 밖에 안된 개비는 브라이언의 적극적인 구애에 망설임 없이 그와 함께 삶을 꾸려나가기로 결정한 듯 보인다. 하지만 광활한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캠핑카 여행에서 약혼자만을 의지했던 대가는 죽음으로 돌아왔다.
아리따운 젊은 백인 여성의 실종과 사망으로 이어진 한 달 동안 언론은 매일 이 사건을 주요 뉴스로 보도했고, 대중의 관심도 쏟아지면서 '실종 백인 여성 증후군(Missing White Woman Syndrome)’에 대한 비판도 대두되었다. 그동안 이 지역에서 원주민과 유색인종 700여 명이 실종되었지만 언론에 보도는커녕, 경찰의 관심도 없이 지나가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젊은 백인 여성은 보호받아야 하고, 반드시 구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미국인들의 심리가 개비 페티토로 인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개비 페티토는 가장 친밀한 관계였던 약혼자에게 캠핑카 여행 도중 폭행을 당했고, 결국 살해되었다. 일종의 교제살인이 일어난 것이다. 아버지에게 등짝스매싱 한번 당한 적 없이 곱게(?) 자란 내게 가정폭력이나 교제폭력이라는 것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뉴스에서 ‘데이트 폭력’으로 불리는 사건이 등장하더니 최근에는 ‘교제폭력과 교제살인’ 관련 뉴스를 접하는 빈도가 잦아져서 무덤덤해지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5월 서초구 빌딩 옥상에서 의대생 최모(25세)씨가 여자친구 남모(24세)씨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수능만점에 명문대 의대생으로 알려진 피의자에게 1심 재판부는 징역 26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재범 가능성을 넘어서 동종 범행을 저지를 개연성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검찰이 청구한 전자장치 부착명령도 기각했다.
2016년 인천에서 벌어진 사건의 결말은 놀랍도록 슬프고 참혹하다.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 순간 화가 난” 남자는 들고 있던 90센티미터 길이의 검은색 장우산을 불과 1미터 앞에 서 있던 여자를 향해 던졌다. 우산 꼭지가 여자를 향하도록 한 후 중간 부분을 잡아 들고 힘껏 던졌다. 그대로 여자의 왼쪽 눈 부위 미간을 찔렀다.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우산 꼭지가 눈 안쪽으로 6센티미터 이상 들어갈 정도였다. 두 눈 뒤쪽에 있는 나비뼈가 부러졌고 그 파편이 뇌교(중추신경계 일부)를 손상시켰다. 여자는 50분 후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상해치사 혐의로 기소된 남자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4개월 후 풀려났다. 2017년 8월에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은 것이다. 남자가 피해자 유족에게 건넨 합의금 2억 원, 여자의 가족은 항소심에서 남자에 대한 선처를 탄원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중에서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을 정리한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다. 코앞에서 여자친구 얼굴을 향해 장우산을 강하게 던져 우산 꼭지가 6센티미터 이상 눈 안쪽으로 찔렀음이 ‘사실’로 받아들여졌어도 합의만 한다면 가해자는 징역 없이 집행유예로 풀려나 활보하고 다닐 수 있다는 ‘현실’이 새삼 충격적이었다.
가장 가까운 연인이 잔인하게 돌변하여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괴물로 마주할 때 느끼는 고통과 공포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널 위해 준비했어” 같은 한없이 자상하고 달콤한 구애를 하던 그들이 마음속에 “내가 가지지 못하면 부숴버리겠어”도 장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까닭에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상하다 싶으면 애써 ‘아닐 거야, 내가 예민한 거야’를 되뇌면서 끌려가지 말고 일단 멈추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