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분명 기이한 나이다. 작년까지는 안 그랬는데, 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내 나이에 대한 인식이다. 안개가 낀 듯한 느낌 속에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정말 서른 살이 되어버렸구나, 한다. 이제 분명한 건 어리다는 자랑 하나가 사라졌다는 점. 이상하게도 한 살씩 먹어갈수록 무엇인가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사라져 가는 기분. 분명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가 유실되고 있다는 불쾌함. 확실히 서른이라는 나이는 모두에게 독특하게 받아들여지는 지점이 있는 것인지,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나이를 설명하거나 묘사해왔다. 누군가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나이로 칭했고*, 혹은 누렇게 변한 좌변기에 앉아 곰곰이 떠올리는 나이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아무런 광채 없이 미래만 보고 살아가다가, 문득 시간 속에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며 확인하는 시기로 묘사하기도 했다***.
고작 일 년 차이인데, 스물아홉과 서른은 확실히 다르다. 무엇보다 판단이 현실에 유착되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는 점. 이게 과연 좋은 것일까. 물론 햇수가 쌓여가며 획득하게 된 경험치로 인해 나름대로 확장하게 된 감각들도 있었다. 보다 나아진 것들도 많았다. 여전히 월세이긴 하지만, 식탁과 책상을 따로 쓸 수 있는 곳으로 이사하게 되며 집(혹은 내면)의 구조를 전보다 여유롭게 고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내 안에서 잃어가고 있는 게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시 쓰기를 가장 위협하고 있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 고쳐 말해 현실이라는 것이 가지는 예측불허의 성질은 이제 신기한 것이 아니라 기이하게 피부에 와닿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고통이나 슬픔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포트폴리오에 대한 부담이나 성취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몇 사람의 죽음을 통과하거나 목격하며 사람이라는 건 순식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조금씩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사람의 생이라는 것은 두 손으로 길어 올린 물과 닮아있기에 점차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새어나가거나, 너무 쉽게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결국 내 안에서 새어나가고 있는 것은 시간 그 자체였다.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잃어가며, 혹은 ‘그’라고 생각했던 이미지와 물성, 기억 따위를 마음과 시간의 틈 사이로 잃어가며, 존재라는 것은 벽에 못을 박듯 고정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존재라는 것은 문학 안에서 온갖 방식으로 구체화되지만,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내던져진 채로 온갖 외상을 통과해가며 살다가 어느샌가 피투성이가 되어버린다는 것. 이 슬픈 사실을 가장 훌륭하게 요약하는 한 편의 시가 있다.
흙속에서
그 얼굴을 알아보았네
끝이 거의 문드러져
아무것도 열 수 없게 된 열쇠 하나를
어떤 화염이 지나갔을까
누군가 긋고 간 성냥처럼
먼 곳에서 던져진, 던져진, 내던져진 불꽃
세상의 문들이
일제히 눈앞에서 닫히고
그는 흙투성이가 되어 깨달았을지도 모르지
피투성은 우리를 피투성이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밟고 가는 흙속에서
언뜻 그를 알아보았네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된 그는
미움으로 눈멀었으리라
뿔과 발톱과 견치로 싸우던 시절
피투성이가 되어 싸울수록
세계의 핏물은 점점 진해지고 흥건해지고
핏물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린
부서진 얼굴
여기서는 던져진 돌조차 땀을 흘린다
- <피투성>, 나희덕.
이것은 내게 남은 문이 몇 개 없었을 때 만난 스승의 시다. 스승께 무엇을 배워왔는지 이곳에 전부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 광장으로 나가는 법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크다. 물리적인 맥락에서든 정신적인 의미에서든 말이다. 실제로 선생님과 함께 집회에 나가, 꽁꽁 언 땅에 앉아서 촛농을 흘리며 타오르던 초를 오래 보았던 기억. 어쩌면 그날 이후로 겨울은 내게 가장 시적인 계절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몇 년 후, 폭설이 쏟아져 길가와 코끝이 얼었던 새벽에, 나는 늦은 귀가 끝에 편지함에 담긴 시집『가능주의자』를 만나게 된다. 자줏빛 커버의 책이 꼭 따뜻한 피가 도는 심장처럼 느껴져서 손에 오랫동안 쥐고 있던 기억.「피투성」은 그 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다. 서른 살이 된 내게 이 시는 보다 육체적으로 실감되며 읽힌다.
내가 여전히 초를 쥐고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돋아난 뿔과 발톱과 견치가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말 이상하게도, 할퀴면 할퀼수록 할퀴어진다. 조금씩 고이는 핏물, 그리고 그 속에 두 손을 담가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반쪽 얼굴을 건져 올리려는 시도. 서른이 약 한 달 남은 시점에서, 나는 이제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