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물속의 돌>
서촌 돌담길을 걷다가 마주한 보안여관. 통의동 보안여관은 2004년까지 실제 여관으로 사용되었으며, 많은 문화예술인이 머물렀던 곳이다. 현재는 그 정체성을 이어서 보안책방, 보안스테이, 아트스페이스 보안, 카페 33 마켓으로 운영되고 있는 복합문화공간이 되었다.
아트스페이스에서 진행되는 전시 <물속의 돌> 공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돌'을 볼 수 있다. '추운 실내를 대비해 따뜻한 돌을 준비했습니다.'전시의 제목을 알기 전, 포스터도 보기 전에 마주하게 된 따뜻한 돌 덕분에 보지도 않은 전시가 벌써 마음에 들었다. 선뜻 꺼내기가 망설여져 왼쪽의 안내 종이 두장만 들고 입장했는데, 둘러보다 보니 정말 실내가 춥긴 하더라.
전시는 작가의 암 투병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작품 제작을 위해 투병 기간 동안 사용했던 주사기, 뽑힌 머리카락 따위를 모았다. 작업 중간에는 이것들을 왜 모으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모여 서사가 되고, 서사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요즘 여러 작품들을 보면서 자주 하게 되는 생각이었다. 긴 시간을 들여 모인 어떤 것들은, 개별이 합쳐진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에는 이렇게 탄생하는 작품들이 솔직히 쉬워 보였다. 그냥 시간만 투자하면 나오는 거 아닌가 하는 아주 얕은..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하나를 꾸준히 수집하거나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고, 이것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을 잘 몰랐던 거지!
그렇게 모인 머리카락과 주사기 끝에는 작가의 발사진이 놓여있다. 언뜻 보면 까맣고 망가진 발톱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끝에서 새 발톱이 돋아나고 있다. 좋은 신호다.
2층 전시에서는 작가의 신체에 대한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었다. 계단에 붙은 안내문에서는 작가가 작품 내 육체와 성(sexuality)을 분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밝힘과 동시에 관객에게도 작품에 대한 존중을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2층에서는 곧이어 암이 퍼지는 작가의 신체 사진을 마주하게 된다. 방금 전 안내문을 봤음에도 작가의 신체가 드러난 작품을 사진으로 기록하기에 조심스러워졌다. 신체와 성을 분리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암이 퍼진 사람의 신체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낯섦이었지 않을까.
독일에서 전시를 진행했을 당시 오프닝 퍼포먼스로 '반영'이 진행됐다. 퍼포머는 조명과 거울로 만들어진 탈을 쓰고, 관람자의 모습은 거울에 반영된다. 전시는 단지 작가의 아픔, 투병 과정의 힘듦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과정이 사회로 확대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닿길 원한다.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것.
전시를 보면서 물론 암투병의 고단함도 느껴졌지만 동시에 그 끝에서 생동감, 회복력 같은 따뜻함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느낌은 전시의 끝, 출구에서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귀엽다 정도로 그쳤던 따뜻한 돌이 전시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손으로 온기를 전하면 검은색만 덮여있던 종이에 작가의 글이 드러나는 엽서도 전시를 닮았다.
엽서에는 '수없는 바람과 물결로 둥글어진 것들로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골라내면서 이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지난 여정을 상상해 본다.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연결되어 당신에게까지 이를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전시와 별개로 아트스페이스 보안, 보안여관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해체된 공간 곳곳에 여관으로 사용됐던 흔적이 남아있다. 더 이상 본래의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공간들을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보안여관 같은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나름이다. 방을 따라 작가의 생활이 전달되는 전시와 공간이 참 잘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