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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류 Nov 17. 2022

H

2022년의 수능날이 왔다.


첫 수능을 본지 3년이 지났고, 과외 학생들도 아직 수능을 볼 나이가 아닌지라 이번 시험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저께 H가 수능을 본다고 말했다.


첫 수능이란다. 공부는 안 했다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공부를 안 한채로 수능을 보면 '나 아무것도 준비 안 하고 수능 본다!'라고 즐기기라도 하지, 기운이 없어보였다.


"이거 근데 필기구 안가져가는건가 그럼? "

"그.. 지우개랑 샤프심은 챙겨가셔야죠."


"이거 근데 5교시 안 보는 사람들은 뭐해? 그냥 앉아있어?"

"5교시 안 보는 사람들끼리 배정받는거라 끝나고 집 가면 돼"


"신고 간 신발은 신고 있는거지?"

"뭐 비행기 처음 타러 가냐? ㅋㅋㅋ"

"아 나 장애인 같네"


"핸드폰은 가져가는거야? 넌 어떻게 했어?"

"가지고 갔다가 제출하고 집 갈 때 돌려받았지"


수능 시험장 수칙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첫 수능을 보는 학생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시험 한달 전부터 몇번이고 선생님들이 알려준다. 안내문으로, 육성으로, 화면으로 말이다. 


H는 3학년으로 진급하기 전에 학교를 떠났다.



 고등학교 입학 이전에 한번 학교를 가야했던 날이 있었다. 엄마가 웬 애가 패션이 너무 멋지다며 한 남자애를 가리켰다. 칙칙한 무채색 패딩을 입은 아이들 틈에 비비드한 오렌지색 옷을 입은 애가 눈에 들어왔다. 바지 한 쪽은 롤업이 되어 있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애인가보다하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는 말이 정말 많았다. 입학설명회도 한 번 듣지 않고 특목고 입시고 뭐고 그냥 혼자 준비해서 이 학교에 들어왔던 나와 달리 입학 전부터 커뮤니티를 형성해온 애였다. 그 애가 하는 말들에 계속 물음표만 던지니 자신이 친절하게 학교 애들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했다.


"저 여자애는 인스타 팔로워가 많아. 근데 실물 보니까 그냥 키작고 평범하더라. 저기 청자켓 입은 남자애는 페이스북에 떴던 애야. 그리고 쟤는..."


정말 안 궁금해서 그냥 얼른 입 다물길 바라는 마음으로 흘려 들었다. 잘 모르는 사람 이야기를 남에게 떠들어대는 것만큼 멍청해보이는 게 없어서 옆자리 여자애 이름만은 확실하게 기억해뒀다.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지, 하고.


오렌지 남자애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의외였지만, 입학 후 머지않아 저 애의 이야기가 들려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사람들 눈에 띄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속에서의 결말이 좋지 못했다.


옆자리 여자애가 언급했던 애들도, H도, 나도 실제로 그랬다.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동아리 가입 시즌이 왔다. 사람들 앞에 서면 떠는 게 싫어서 극복해보고자 보컬 동아리에 지원했다. 노래는 죽어도 남 앞에서 못하는 거라 극약처방을 내린 셈이었다. 합격하고 보니 오렌지 남자애가 있었다. 그게 H였다.


같은 동아리긴 했지만 그 애와 말을 섞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1학년 때는 같은 팀으로 공연을 했는데도 그랬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센 인상에 과묵한 성격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 때 나는 윗 기수 동아리 선배들과 훨씬 친했기 때문에 딱히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 그 애가 신경쓰이지 않았었다.


그나마 몇 번 나눈 대화에서는 뭔가 엇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재노창이 좋다고 말했더니 H가 비웃는 걸 보면서 이 새끼도 사회성 바닥난 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사회성이 0에 수렴하기 때문에 동족혐오본능으로 피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고등학교는 한 학년에 남학생이 4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극악의 성비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애들은 거의 하나의 집단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 애들이 어떻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 중에서도 H는 남자 무리의 주동자같은 이미지였다. 아마 학교의 대부분이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H가 어떤 학생에게 폭언을 하고 괴롭힘을 주도한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왔다. 동아리에서도 H는 굉장히 제멋대로에, 종종 의욕없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소문이 크게 과장됐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다.


나라고 H와 크게 다른 처지는 아니었다. 나도 입학하자마자 근거없는 소문의 근원지들을 족치고 다니는 바람에 졸지에 기센 인간이 되어있었고, 이러한 내 이미지는 첫 중간고사를 마친 후 기숙사에서 술을 먹은 사실이 걸리면서 더 개판이 됐다. 의정부에서 오토바이를 끌고 다니는 양아치였다는 이야기까지 도는 지경에 이르길래 나중에는 그냥 체념하고 살았다. 내가 학교생활을 개판으로 한건 맞지만 그게 근거없는 헛소문의 정당화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깊은 회의와 환멸이 찾아왔다.


내가 들었던 H의 이야기는 전체의 극히 일부였을 것이다. 애초에 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친구도 대부분 나같은 애들로만 사귀었기 때문에 학교의 소문들을 굉장히 늦게, 제한적으로 아는 편이었으니까. 내 소문조차도 일부만 아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H의 이야기는 꽤 많이 들려왔다는 것이 기억이 난다.


쟤도 참 학교생활 엿 같겠다 싶었는데 급식실이나 동아리실에서 마주치는 H는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난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데 쟤는 깡이 더럽게 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더러운 인상과 험악한 말투에 매사에 관심없어보이는 듯한 태도. 거머리같은 것들이 드글거리는 이 학교에서도 저 꿋꿋한 모습을 유지하는게 부럽기도 하고 비정상같아 보였다.


'또라이...'


그게 H에 대한 나의 마지막 감상이었다. 이후 H가 자퇴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특목고에서도 성적이 전교권 나오는 애가 뭐가 아쉬워서 자퇴를 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뿐이었다. 몰아치는 수행평가와 수능걱정에 치이느라 그 애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가끔씩 자퇴하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 때마다 H의 생각이 났다. 뭔가 그 애는 자퇴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다 좆밥같아보이겠지, 걔는'


어느 날 H에게 카톡이 왔다. 의미없는 잡소리와 함께 자신의 눈알 사진을 보냈다.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닌데, 아니 애초에 연락할만큼의 작은 친분조차 없는데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카톡을 보낸 걸까. 근데 이런 또라이같은 연락 방식이 H다워서 웃겼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잊을만하면 H에게 연락이 왔다. 거의 1년은 간격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애는 여전히 필터링이라곤 없는 충격적인 말들을 서슴없이 했다. 그쪽에서 그렇게 하니, 나도 말을 거를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INTJ들의 대화 그 자체였다.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망발과 실없는 농담이 오갔다.


22년 여름부터는 지속적으로 연락이 이어졌다.


H와 대화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 애는 은근히 무른 구석이 있고,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고,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성향이 있다.


웃음포인트는 킹받음이다. 킹받는 것들을 굉장히 좋아해서 맨날 잼민이 릴스를 보내온다.


말투는 좀 병자같다. 계속 의미없는 헛소리를 하는데, 재미있어서 하는 느낌은 아니다. 무언가를 외면하기 위한 헛소리다. 가끔은 이런 헛소리들이 H의 약한 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애브리띵 애브리웨어 올 앳 원스 보고왔어"


"그게 먼데 씹덕아씹덕아씹덕아씹덕아씹덕아

봐야 하는데 그거

흠"


"띵작이야, 보고 기립박수 쳤다니까"


"봐야 하는데

봐 야 하는 대

봐야? 하는! 데~"


매번 이런식이다. 차라리 이 애가 진짜 정신병자라서 이런 대화를 하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왜 이렇게 다분히 의도적이고 작위적으로 헛소리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화가 깊게 이어지기를 원치 않아서 하는 행동인 것 같아 그냥 내버려두었다.



H는 무의미한 잡소리들 사이에 가끔씩 자신을 비출 때가 있었다.


"힘들다 인생이"


"나는..모르겠어 아무것도"


"상태가 안좋아서 누워만 있었어"


"마음이..."


그 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전혀 모르지만 꽤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굉장히 사납고 강해보였던 고등학생 H는, 굉장히 무기력하고 공허한 성인이 되었다.


H가 내게 연락을 해올 때마다 나는 휙휙 바뀌어 있었는데 H는 한결같았다. 변함없는 H의 인스타그램이, 그 애의 시간이 멈춰있는 것처럼 보였다.


H는 왜 자퇴를 했을까

H의 소문은 어디까지가 진짜였을까

H는 왜 모두가 좀비 떼처럼 앞만 보고 기어가던 그 길에서 벗어났을까

H는 왜 전혀 친하지 않았던 나에게 연락을 했을까

H는 지금까지 뭘 했을까



많은 의문이 들었다. 물어보면 답해줄 것 같았지만, 묻지 않았다.




과거의 나는 H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두려워했다. 언뜻 그 애에게서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 애가 학교에 오래 버텨주기를 바랬다. 나와 어딘가 닮아있는 그 애가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다니는 걸 보면 내 마음이 좀 더 편할 것 같았다. H의 소문들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가짜인지는 관심도 없으면서, 마냥 그 애가 멀쩡하길 바랬다.


"자퇴하고 몇 번 갔었는데, 갈때마다 울렁거리더라 ㅋㅋ“


H가 처음으로 드러낸 과거의 속마음에 심장이 철렁했다. 그곳에서 내가 H의 인내를 바란 비겁자였기에. H가 그 학교에서 그런 트라우마를 안고 떠났을리 없다고 확신했기에.


"너가 사과도 할 줄 알아? 의외다"


H의 연락을 받은 나는 매번 고등학교 때의 H의 소문을 상기하며 계속 그 애에게 의외라고 말했다. 여린 구석이 있다는게, 타인의 마음을 살필 줄 안다는게, 사과를 한다는게 당연히 H에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뭐가 자랑이라고 그걸 H에게 당당하게 말한건지. 나는 그 애를 향한 편견에 일조한 사람이었다.


굉장히 무례하고 한심한 내 자신 때문에 H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H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내가 얼마나 생각없이 그 애를 대했는지 알게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H도 나랑 똑같이 그 학교를 지옥이라고 생각했다.숨이 막혀서 정말로 죽을 것 같았던 그 감정을 H도 느꼈을 것이다. 왜 나는 그 애는 그렇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을까.


결국 내 이기심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그 애가 친구로 느껴졌다. 4년이 넘는 시간동안 새로 친구가 되었다고 느낀 사람이 없었는데, 그 애는 알게 된지 4년이 지나서 새로운 친구가 됐다.



여러모로 많은 정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많은 대화가 필요해보였다. 나의 비겁함을 마주하기 위해서라도, H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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