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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좀 아는 언니 Aug 15. 2023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상처는 어떻게 우리를 괴물로 만들거나 혹은 개과천선하게  하는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개인은 각자 나름의 경험과 학습으로 자기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모두의 생김새가 다르듯 뇌구조가 다를 것이며 십 인 십 색의 인생관과 철학을 가지고 산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 이해받기를 기대하는 것 모두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살면서 가깝거나 먼 타인들이, 경험과 시간을 같이한 정도와 상관없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상식은 타인의 상식과 다른 것인가? 아니면 나의 상식이 잘못된 것인가? 


최근 나 역시 타인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예전과 달리 조금은 태도가 유연해진 것을 경험한다. 이전의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들에서 나와 나의 의견을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하면 이 모순적인 상황을 잘~ '지나가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는 내가 옳다는 생각이 오류가 많음을 알았고

둘째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라는 쓸데없는 의협심(오지랖)도 내려놓게 되었다.


무관심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임상적으로 이편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다.

빠른 시간 내 나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시간에 맡기는 지혜, 내 안에 능구렁이가 장착되었고 대신 그 더 깊은 이해를 위한 근원이 궁금해졌다.








서로를 이해 못 하는 근원에 대하여 오늘 내가 생각한 결론은 어린 시절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제각각이라서다. 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받을 권리만 있는 어린 시절, 존중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은 상처를 품고 산다. 무시당하고, 상처받고, 비교당한 경험이 무의식 속에 축적되어, 의견이 다른 대립과 갈등의 상황에서 객관화하기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갈등 상황에서 이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의 골을 깊게 만들기보다는 그 사람 안의 어린아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며, 측은지심을 가지고 시간을 두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갈등은 상대적인 것이다. 우선 나의 반응들을 점검해 보고 나의 방어기제들이 상황을 인식하고 왜곡하지는 않는지 반문해 보는 것이 먼저다.


타인의 이해에 특별히 민감한 사람들은 이것을 더 빨리, 잘 이해하고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는 유연함을 가진다. 그리고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임상적 경험의 축적으로 이해받기보다 이해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게 된다. 중년이 되면, 인생 전반전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시기였다면 이미 시간과 경험이라는 치유제를 처방받은 나머지 인생은 자기 책임이 더 커지는 시기다. 스스로의 상처를 인식하고 생활패턴에서 방어기제가 작동할 때 알아차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타인에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이제 조금 더 너그러워질 시간이다. 이해 못 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시간과 경험이라는 치유제의 힘을 믿어야 한다. 섣부른 판단과 개입은 자연의 치유에 의해 상처가 아무는 과정에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자연은 돌고 돈다. 인생도 돌고 돈다. 우리에겐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것이 없다. 먼저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 즉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고, 비판, 충고, 조언은 접어두자. 거기에는 타인의 세계를 나의 세계의 틀로 재단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흔히들 말하는 '내가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에는 폭력이 담겨 있다. 아무도 자신보다 더 자신을 더 깊이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한다. 그가 방어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생각해서이다.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대신 그 상처를 이해하고 시간을 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나의 상처로 인해 성질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질러댄 날,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고 비판하는 대신, 나는 갑자기 입을 닫고 나와 타인의 상처를 다시한번 들여다 보았다.  


상처란 놈은 수십년이 지나 죽을때 까지 나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상처로 인해 더이상 상처받지 않을 브레이크를 장착하게 되었다. 더이상 쓰라린 것이 아닌 흉터와 기억으로 남아 오만해지려하는 나를 제어해줄 동반자 같은 존재로 말이다. 


네가 대우받고 싶은 방식으로 남을 대우하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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