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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me Nov 30. 2022

빈틈

 겨울나무는 꼿꼿이 하늘을 우러른다. 바람이 비껴가도록 맨 가지로 고행하듯 추위와 맞서고 있다. 해거리로 찾아오는 겨우살이는 이미 생존이다. 앙상한 모습은 버려진 사람처럼 쓸쓸하지만, 민낯으로 대면하는 당당함이 있다. 꽃으로 잎으로 감추지 않은 자신의 빈틈을 훌훌 내보이기 때문에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겨울나무들이 함라산 둘레길을 목각 병정처럼 에워쌌다. 숲길은 낙엽으로 덮였던 가을을 잊지 못하는 듯 잔돌 틈에 끼인 낙엽의 잔재를 붙들고 있다. 인적이 만든 두 갈래 산길은 나란히 구불거리며 산허리를 가른다. 그 길에 서면 그리움이 먼저 발길을 내딛는다. 나비가 날던 길은 붉게 청춘을 불사른 계절을 보내고 고즈넉하다. 찬란한 잎들의 허세가 꺾이고 뿌리의 작용이 근근한 시절이라 나무의 수액은 말라간다. 봄을 기다리는 

믿음이 뿌리의 자양분을 만든다. 덕분에 마른가 지가 허공에 빈 손짓을 하여도 서글프지 않다. 

소리 없이 멀어져 간 사랑처럼 메아리 끊긴 숲에서 심장이 조용히 두근거린다.  

   

  똥 바위 지겟길의 갈림길에서 앞으로 난 길로 걷는다. 모퉁이 오솔길을 돌아든 산길이 아름다운 곡선을 이어간다. 단풍나무 아취를 이룬 언덕에서 금강 줄기가 내려다보인다. 숲길을 따라 걷던 그리움이 바람과 교접하며 강물로 이동한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은 빠르게 바람을 탄다. 그 끝점을 붙잡고 연을 날리듯 그리움을 날려 보낸다. 내가 보내지 않아도 달아날 그것이 숲을 건너고 마을을 지나 강물에 가 닿는다. 

그리움은 나의 손끝을 떠나 물속으로 사라진다.     

  안개가 걷히듯이 비로소 내가 걷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들은 지지대를 벗어나 길을 따라 비스듬히 서 있다. 첫 번째 쉼터에서 강을 다시 바라본다.

  사라져 간 그리움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떠오려나. 지난봄, 여름, 가을 유람선은 황포 돛을 펄럭이며 느리게 금강을 가로지르며 갈대밭을 맴돌았다. 금빛 물결 출렁이던 금강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좋다고 살랑였다. 뱃머리에서 사람들은 환하게 웃었다. 유람선이 만들어낸 물 띠의 흔적처럼 물 위에 써진 이야기는 물의 언어가 되어 흩어졌다. 인생은 이렇게 모였다 흩어지며 추억을 만든다. 빈 틈 사이에 끼워 넣진 흔적처럼 지독히 아픈 일, 가슴 벅차게 즐거웠던 일도 지나고 나면 그뿐이다. 상처야 남지만 사라지는 물의 언어처럼 사라져 그리움으로 떠돈다. 물에 닿은 나의 그리움도 일상의 긍정도 강물에 순하게 녹아들어 

어느 순간 다시 형체 없는 그리움으로 돌아오리라.     

 

 요즘 부쩍 앞날에 대한 불안이 늘고 있다. 매사에 사사로운 외로움이 마음속을 비집는다. 바람대로 살고 있지 못한 자신에게 회의가 생긴다. 엉킨 마음으로 나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묻고 물으며 산길을 걷는다. 길은 묵묵히 앞을 터줄 뿐이다. 칡넝쿨에 갇힌 나무처럼 알 수 없는 불안을 안고 습관처럼 걷는다. 인생을 사는 것이 이러저러한 그리움 놀이인 듯 마음속이 바람 든 무 속이다. 바람에게 미안하지만 그 바람 때문에 살고 있는 것 같아 고맙기도 하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속 빈틈이 늘어가면서 변덕도 늘고 있다. 

몸과 마음이 겨울이다.     

  겨울 숲은 을씨년스러워도 좋다. 겨울나무의 애처로운 가지 끝에 눈꽃이 피어나거나 햇살이 걸리면 나뭇가지는 내가 놓친 시간들을 매달고 보란 듯이 허허댄다. 뿌리로 물구나무 서 듯 묘기를 부리는 겨울 나목을 보며 허술한 마음에 힘이 생긴다. 땅이 얼어붙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꼿꼿하게 바람을 맞는 굳건한 나무에게 배운다. 한 때 찬란히 빛나던 푸름의 조각들을 날려 보내고 맨 몸으로 버티는 나무의 믿음은 신앙에 가깝다.

 믿음처럼 봄을 맞을 것이기에 화려한 잎사귀들을 벗어던지고도 겨울나무는 의젓하다. 

오히려 버림의 자유와 빈틈이 주는 여유를 즐긴다.    

 

“여러분, 완벽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빈틈이 있을 때 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브레네 브라운이라는 심리연구가의 말이다. 불안 속에 살던 그녀가 진심으로 치유를 느낀 순간은 부족함을 숨기려 했던 순간이 아니라, 나 괜찮지 라거나 자신에 대한 긍정과 억지로 쓴 가면을 벗어낼 때라고 말한다.

겨울나무가 전하고 싶은 말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나무가 될 수 없는 나는 여전히 비워내고 벗어내는데 익숙하지 않다. 

늘어난 불안감은 혈류를 타고 수시로 심장을 두드리며 빈틈을 넘본다. 

나는 또 산길을 걸으며 인생을 돌아보고 그리움을 떠나보내며 버려야만 얻어지는 

겨울나무의 빈틈을 우러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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