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자가 필요로 하는 것과 조직이 요구하는 것 사이의 접점을 확정하고 이를 프로그램의 각 요소에 구현해 가는 '기획'이 좋았다. 정해진 지시를 단순히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서사를 내가 결정하고 모든 것에 나의 숨을 불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숲의 모습이 어떠한지 알기에, 나무 하나하나에 어떻게 숲을 담아갈지 고민하는 과정이 특히 재미있었다. 마치 드라마 한 편의 PD가 된 것처럼 말이다. 만족스러운 성과는 목적지를 향해 각 구성 요소들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굴러가 안착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목적지를 잘못 정하거나, 제대로 정했지만 톱니바퀴를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경우 엉뚱한 곳에 굴러 떨어졌다. 열심히 배를 만들어 산에 보낸 격이었다. 이 또한 배의 주인인 기획자의 온전한 책임이라, 그 리스크와 부담이 자주 버거웠다. 모든 게 완벽했던 것 같은데도 성과가 없어 낙담했고, 역시 완벽했던 것 같은데 불쑥 튀어나온 디테일 실수가 스토리 엇박자를 만들어 당황스러웠다. 버라이어티한 변수들에 노련하게 대처하는 건 늘 쉽지 않았다. 날벼락같은 변수로 다 된 프로그램을 없애야 했을 때는 허탈했다.
그럼에도 모든 시간에 나의 숨을 불어넣는 그 맛이 뭐길래, 요즘 다시 기획이 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