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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혼부르스 Nov 23. 2022

준비하지 못한 은퇴와 인생 2막

교통사고로 은퇴를 하게 되다     


가족 생일 기억나듯 교통사고가 일어났었던 날도 뚜렷이 기억이 난다. 바로 추수감사절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린이 영어예배에 봉사하고 있었던 나는 추수감사절이 끝나고 함께 봉사하시던 권사님이 싸주신 몇몇 과일들을 담은 백을 어깨에 메고 한쪽 어깨에는 성경책이 든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초등학교 근처 건널목에서 사고를 당했다. 200m만 더 가면 집인데.


비명을 지르며 나는 왼쪽 다리를 부여잡고 건널목 바닥에서 데굴데굴하고 있는데 개인택시 운전사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구급차를 불러달라던 나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한 채 하는 말이,

“전화기가 지금 없어서 ...” 하며 점퍼 호주머니를 뒤적뒤적해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를 떠안아 택시에 실으려고 다가왔을 때, 나는 무슨 정신으로 그 택시 기사에게 소리쳤는지 모르겠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손대면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그때 마침 태권도 승합차가 지나가다가 정차한 후 112에 신고해 주었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경찰차와 구급차가 동시에 왔었다. 그제야 택시 운전사는 어디서 슬그머니 전화기를 꺼내 택시조합에 전화를 걸었다. 본인이 사고를 냈다고.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소름이 오싹 돋는다. 만약, 그 개인택시 운전사가 나를 택시에 태워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운전사는 20년 무사고 운전자였다고 했다.     

각종 검사를 끝내고 링거를 매달고 입원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학원 원장에게 사고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원장은 놀라면서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맡은 3, 5, 6학년 수업에 당장 차질이 생기게 되다 보니 대체할 선생을 갑자기 구할 일이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교통사고로 인해 계약기간과 상관없이 퇴직이 되고 말았다. 

3개월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느꼈던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유턴이 되어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      


정형외과에서 깁스하고 어느 정도 치료가 되었을 즈음 나는 한방병원으로 옮겨 다시 입원했었다. 그 한방병원은 양방과 한방을 겸하는 병원이었고 정밀검사를 위해선 종합병원 정형외과로 다니게 했었다.

중간중간 종합병원에 갈 때마다 병원에서는 한방에서 받는 치료에 놀라곤 했었다. 한방병원에서 나를 담당하는 의사 선생님은 대학교수이시기도 했지만, 몹시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아침마다 4명의 젊은 의사 선생님들이 함께 들어왔고 침술과 함께 약 짓는 법을 새롭게 알려주었고 나중에는 물리치료도 직접 해 주기도 했었다.     


병원에 오래 있다 보면 자연히 ‘슬기로운 병원 생활’이 된다. 한 명이 퇴원하면 자리 옮기기가 이루어졌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장 오래 입원하고 있는 환자 중의 한 명이 창가에 있는 침대로 옮겼다. 그곳에는 창가에 책도 올려놓을 수도 있고 꽃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밖의 경치도 맘대로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었다.

내가 그 자리로 옮겼을 즈음 여섯 명 중의 한 명만 빼고 모두 나이가 같은 환자들이었다. 우연치고는 꽤 신기한 일이었다.

하는 일은 뭔지, 어디에 사는지, 왜 입원하게 됐는지 등등 3개월쯤 입원하고 있다 보니 우리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말하게 되는 곳이 병실이었다.

각자 사고로 정형외과를 거쳐 들어온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사고에 대한 사연도 가지각색이었다.     


사다리 위에서 짐을 내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머리 수술을 하고 오신 분도 계셨고, 대기업 식당에서 일하시던 요리사분도 계셨고 김천에서 모종 농사를 짓는 분도 계셨고, 사우나에서 강화유리가 깨져 등에 파편이 튀어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건너온 분도 계셨고 제일 나이가 많았던 한 분은 어깨 수술을 마치고 오신 분이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환우애랄까 동지애랄까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연세 높으신 분을 왕언니라 불렀다. 특히 동갑내기 환자 다섯은 모두 퇴원하면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나자고 다짐하며 하나둘씩 퇴원해 나갔다.


나이가 제일 많았던 분만 빼고 드디어 나도 퇴원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통원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보니 연락을 주고받고 만난다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있었다. 게다가 무작정 쉬고 있는 시간이 전혀 즐겁지 않았기에 더욱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왜 먼저 나간 환우들이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가끔 잘 지내냐는 카톡 정도 주고받았지만, 그것도 뜸해지다가 급기야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끊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모종을 주업으로 하고 포도와 자두 농사를 조금 짓고 있던 황 여사를 좋아했다. 사근사근한 경상도 말투에서 느껴지는 순진함에 약간은 햇볕에 그을린 듯한 가무스름한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수줍음이 모두를 기분이 좋게 만들었다.


내가 그녀와 다시 연락이 닿았던 때는 그녀가 집안 결혼식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을 때였다. 서로 건강해진 후 만나는 것이라 그녀도 나도 뛸 듯이 기뻤다.      

황 여사를 만나면 언제나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다. 내 엄마도 고향이 경상도였기에 황 여사의 말투에서 엄마의 말투가 느껴졌고 황 여사 비닐하우스에 갔을 때 농사지어 준비해둔 참기름이며 무청 시래기며 이것저것 싸줄 때 또한 엄마의 추억이 되살아났었다. 만났다 헤어질 때 빼놓지 않고 건네는 말, 

“항상 건강하레이. 느그 남편한테도 안부 전하고 그람 가제이.” 에서도...     

황 여사와의 친구 관계는 마치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던 것처럼 모든 것들을 공유하고 나누며 지내게 되었다. 살림살이에 대한 일이라면 단연코 황 여사는 주부 구단임엔 틀림이 없었다. 간장 된장 김치에서 깊은 손맛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분명 그렇다. 가을걷이가 끝난 후 만들어 놓았다는 꽃차와 연잎 차에서는 전문 농부의 내공이 느껴졌다.


병실을 나눠 쓰던 환자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내게 소중한 친구로 맺어지다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닌가 보다.     




또 다른 인연      


퇴원 후 일반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시들해져 갈 때쯤, 병원에서 제일 연세가 높았던 왕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경상도 사투리에 서울말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 김희자입니다. 잘 지내지요?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통화가 괜찮나요?”


“어머, 언니~~ 잘 지내셨어요? 팔은 좀….”


“어어, 다 나았지~ 아직 일해요?”


“네.”


그 언니가 전화한 내용은 막냇동생이 이혼 후 7년째 혼자 살고 있는데 만나 볼 용의가 있냐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으니 아마 맺어주고 싶었었나 보다.

간략하게 동생에 대해 설명을 해 주고 며칠 후 다시 전화하겠다며 통화를 마쳤다. 왕언니는 동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사람 마음은 참 이상하다. 스스로 잘 헤쳐 나갈 때는 움직이지도 않다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해질 때 흔들리니 말이다. 다시 전화가 왔을 때 언니는 내게 다짐하듯 물어봤다.


“은혜 씨는 동생에 대해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실하고 착하면 돼요.”


“그러면 두말할 것도 없다. 동생이 틀림없는 사람이란 거 내가 보증할 수 있어요. 은혜 씨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란 거 뭐로 보증할 수 있어요?”


순간 당황했었다. 

“저를 잘 보셨다면 그게 다인데 보증하라시니 뭐로 해야 할지….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 보증해주시면 될까요?”


너무 종교적인 말을 했나 싶어 민망해하는데 언니는,

“그거면 됐어요.”라고 말하고는 유쾌하게 웃었다.     

지금의 남편은 나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왔었는데 마치 얼굴에 ‘착한 남자’라고 쓰여있는 듯했다. 순한 얼굴에 절제 있어 보이는 인상이 참 좋게 다가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 너무 낯익은 얼굴, 분명 누굴 닮았는데….

생각해보니 남편은 나의 둘째 작은아버지를 닮아있었다. 인연은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가 보다.

동생은 내게,

“교통사고가 언니의 인생을 바꿔놨네. 인연이 어떻게 거기서 시작이 될 수 있지?”라고 했다.

나의 삶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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