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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효진 Jul 19. 2024

빗속의 여인

2017.07.09 01:45

  내 기억 속 나의 친아빠는 언제나 말수가 많이 없고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전형적으로 소심한 사람. 아빠는 내가 물어보는 것들 중에서 대체로 모르는 게 없었다. 어린 아이의 터무니 없는 질문들에도 아빠는 성심성의껏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차근차근 알려주었고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으면 메모지에 적어서 주었다. 글씨가 참 예쁘고 멋이 있어서, 어른이 되면 나도 저런 글씨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자주 출장을 갔고 자주 엄마와 다퉜다. 주로 돈 문제였던 것 같은데 자세한 내막이야 모른다. 나는 어른들의 일에 관심을 두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때의 아빠는 아침 8시에 출근해서 6시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내 생일을 앞두고 아빠는 게임 팩과 비디오 게임을 할 수 있는 기계를 사다주었다. 서커스, 갤러그, 슈퍼마리오, 등등. 그 날 신이 나서 땀까지 뻘뻘 흘리며 티브이에 게임기를 연결하는 나를 아빠는 웃으면서 쳐다보았고 설치가 끝나자 나란히 앉아서 밤 11시가 되도록 같이 게임을 했다. 아빠가 제일 잘하는 게임은 갤러그였다. 


  아빠는 흰색 다마스를 몰고 다녔는데 그 차는 우리 동네에서 그다지 흔한 차가 아니었다. 아빠는 다마스 뒷자리에 늘 이불과 베개 같은 것을 두고 주말이면 나를 뒤에 싣고 교외로 나가 이런저런 자연물들을 보여주거나 전시를 보여주거나 했다. 지금 같은 새파란 여름, 하천 둔치에 차를 대고 아빠는 먼저 둑방을 따라 내려가 풀숲에 숨어있는 방아깨비며 메뚜기, 잠자리 같은 것을 잡아서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 형광 연두색을 하고 검은색 줄이 그어져 있던 아빠 손가락만한 거미가 먹잇감을 잡아서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거미줄을 뽑아 하얀 실로 둘둘 말던 모습을 등이 따갑도록 지켜봤던 순간이 있었다. 

  그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아빠는 늘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테이프나 CD를 틀어주었다. 그러면 나는 늘 뒷자리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곤 했다. 아빠는 듣고만 있었고. 어릴 때부터 테이프와 CD를 코묻은 돈으로 사모았던 건 순전히 주말에 다마스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좋아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토록 아빠의 다마스를 좋아했으니, 나는 천리 밖에서도 아빠의 다마스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느날은 학교를 마치고 실내화 가방을 휘두르며 돌아오다가 우리 아파트의 다른 동에 아빠의 다마스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다마스가 왜 저기 있을까? 아빠의 다마스라는 걸 알았으니 뛰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면 그때는 오후 3시쯤이었고 아빠는 늘 6시 언저리에 퇴근했기 때문이다. 어쩐지 아는 체를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그 다마스를 쳐다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에도 아빠의 다마스는 거기에 있었다. 혹시나 해서 나무 뒤에 숨어 번호판을 확인해봤지만 역시나 아빠의 다마스였다. 그리고 아빠가 그 안에 있었다. 이상했다. 아예 우리 집 앞에 있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너무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 아빠가 저기 있을까. 회사에 있을 시간인데.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출근했다가 돌아오는 시간은 똑같았지만 그 차는 늘 거기에 있었다. 나는 끝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아빠가 지키고 싶은 아빠의 비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빠는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이다. IMF 때문에 정리해고를 당했는데 차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거라고, 이제와서 나는 생각한다. 아빠는 모아두었던 돈을 월급만큼 출금해 월급날 엄마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그 다마스 안에서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떤 표정으로 앉아있거나 누워있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언젠가는 아빠와 노래방에 간 적이 있다. 단 둘이 갔었는데, 아마 엄마가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나와 놀아줘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한다. 단 둘이 노래방을 가서 아빠와 나는 번갈아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때까지 아빠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나가는 흥얼거림조차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빠는 생각보다 노래를 잘 불렀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빠는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젊을 때는 전국 노래자랑에 나가 상도 탔다고 했다. 소심한 아빠가 어떻게 해서 무대에 설 수 있었는지, 떨지 않고 잘 불렀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냥 아빠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었겠지.


  무슨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거의 16년쯤이 지났으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딱 하나 기억나는 선곡이 있다. 김건모의 '빗속의 여인'. 아빠는 그때 당시의 최신곡인 김건모의 빗속의 여인을 선곡했고 그 노래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을 만큼 우렁차게 아주 잘 불렀다. 김건모 특유의 목소리를 따라하면서, 이따금 상체를 흔들면서, 벌떡 일어나서. 목소리가 아주 커서 가끔 한 손으로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쩌렁쩌렁 아빠는 노래를 불렀다. 어째서 그 장면이 그렇게 선명한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맘때가 되면, 우연이라도 그 노래의 싸구려 비트가 들려오면 나는 어김없이 그때의 공기와 아빠의 몸짓과 노래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 노오란 레인 코트에 검은 눈동자 잊지 못하네.  나에게는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운 노래로 기억되어 있는, '신나는' 노래. 빗속의 여인.




  이제 나는 이 글 속 아빠와 연락을 하고 지낸다. 2023년 4월쯤이었을 거다. 영화〈애프터썬〉을 보고서 아빠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연락이 닿았고, 만났다. 아빠는 그때까지 내 연락처를 가지고 있었음은 물론 차단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엄마 때문에 보는 앞에서 아빠 연락처를 차단했어야 했다.) 물어보니 내게 연락을 했었지만 내가 이미 차단한 이후라서 연락이 닿지 않았었다고 한다. 뭐 어쨌든. 당시 블로그에 썼던 글을 뒤적여 그때의 감상을 다시 소환하자면, 아빠는 그 사이 많이 늙어 있었다. 저 글을 쓰고도 거의 6년이 지난 시점이니,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다음에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다. 아빠는 내가 대학원에 다닌 것도 모르고 있고, 이제 독립해서 혼자 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다 하자니 시간이 부족할 것만 같았는데 또 생각보다 많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빠는 자기 얘기보단 새로 꾸린 가정에 대한 얘길 많이 했다. 그것도 벌써 꽤 된 일이겠지만 말을 전하는 얼굴이 행복해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고보니 주말마다 올라오는 새로 꾸린 살림은 본가에서 겨우 한 정거장 떨어진 거리였다. 지척에 두고서도 만날 일이 없었다니. 아빠는 나를 만나는 날 참외 세 알과 자기가 쓰던 다이슨 청소기와, 아무튼 여러가지를 바리바리 챙겨서 가져다 주고는 카페에서 자기가 따온 네잎 클로바도 선물로 주었다. 아, 옛날에 아빠와 공원에 놀러가서 네잎클로바를 찾아 따느라 보냈던 여러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맞다. 아빠는 이런 사람이었다. 나에게 아직까지 낭만이라는 것이 성정으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아마 그에게서 온 것이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읽고 있던 시집. 오션 브엉의 <총상 입은 밤하늘>.

  이 글을 브런치에 옮기는 지금도, 아빠와는 잘 연락하고 지낸다. 물론 엄마는 모르고 있고, 앞으로도 굳이 밝힐 생각은 없다. 엄마가 왜 이렇게 아빠를 미워하는가에 대해서는 또 적으라면 적을 수 있지만 솔직히, 그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니 중립으로서 침묵하기로 한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을 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굳이 말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 이건 우리집 만의 문제는 아니다. 개인의 삶이 어떻게 단지 개인의 문제로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 훗날 이 글에 덧붙여 이야기를 쓸 수 있겠지.

  그때를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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