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해주는 마음
엄마에게서 카톡이 왔다.
늘 대장부같이 씩씩하고 조금은 무뚝뚝한 엄마이지만, 부쩍 나이가 들은 엄마는 딸과의 시시콜콜한 대화가 즐거우신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사랑이 정말 많은 분이셨지만, 낯간지러운 애정표현은 어색해하시는 분이었다. 하지만 가끔 나를 꼭 안아주실 때가 있었는데 그때 엄마 품에 들어가면 정말 마치 커다란 새가 나를 꼭 안아주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요즘은 엄마와의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들이 나도 즐겁다. 특히나, 내가 영국에 온 이후로부터 우리 둘은 부쩍 가까워졌다. 물론 지금도 한 달 이상 한국에 가게 되어 붙어있으면 서로에 살아온 생활방식의 차이에 부딪히는 때도 있어 한 달 정도가 우리가 같이 있었을 때의 사이좋음 유통기한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 집은 원체 '무소식이 희소식'이 모토인 집안이어서 그런지 나도 부모님도 서로 연락을 자주 하진 않았다.
우리 집은 예전에는 그렇게 소통이 되는 집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느 고지식한 아버지답게 불통의 아이콘이셨고, 어머니 또한 살가웁게 우리를 대하기보다는 도덕적 관념이 철저하신 분이셨었다. 그러다 보니 마치 판사처럼 이것은 잘했다 이것은 잘못했다 로 판결을 내려주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차가운 이면에는, 두 분 다 노숙자도 그냥 지치지 못하실 만큼 온정이 깊으셨고 주변에 힘든 사람들에게는 항상 먼저 도움을 베푸셔서, 마치 겨울에 자라나는 붉은 동백꽃 같은 분들이셨다. 덕분에 나는 그런 가족의 소통의 부재를 메꾸려는 또 다른 나의 결핍의 방어기제인지는 몰라도 애교도 많고 말도 많은 활발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덕분에 우리 집은 내가 어릴 때 대화가 많았었던 집이긴 했었지만, '소통'이 되진 않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강산도 변하듯 우리 집도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한 불통의 아이콘인 아버지는 조금 예외다.
" 너희 아빠 정말 안 변한다."
엄마의 하소연은 늘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엄마는 잠 못 드는 갱년기의 고독한 밤에 넷플릭스로도 달래 지지 않는 마음을 혼자 어르고 달래다가 나에게 그 카톡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있는 딸은 엄마와 그렇게 또 한두 시간을 시시콜콜하게 떠들면서 엄마를 달래기도 했다가 같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맞대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나도 우리 엄마 아빠의 자식이라, 그저 엄마와 아빠의 이상한 짬뽕으로 공감하나 없는 해결책만을 제시하기 일쑤였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말들을 하면서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더 잘못했나에 빠져 제일 중요한 건 놓쳐버렸다.
내가 엄마의 말에 정말 공감하고 소통하고 있을까?
엄마가 나에게 원하는 게 정말 이런 말들일까?
왜냐하면 이 둘은 분명 내일이 되면 또 여느 때처럼 같이 출근하시면서 둘이 그 전날 미처 못다 나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차 안을 가득 메우며 또 하루를 열심히 보낼 준비를 할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 엄마에게 필요한 건 나의 해결책이 아니라, 가끔 우리 곰 같은 엄마가 아휴 못살겠다 힘들겠다 하면 엄마의 든든한 편 하나가 이 지구 반대편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지속적인 '소통', 내가 아닌 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공감과 배려' 그걸 토대로 한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기본으로 되어야 하는 것 같다. 내가 더 이상의 무의미한 조언을 멈추고 지구 반대편 새벽잠 못 이룰 엄마의 등을 카톡을 통해 토닥토닥 위로하듯 내가 생각했을 때 그 사람을 위하는 것보다 그 사람 입장에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이 정말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닐까?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는데 예전에는 이 말은 칼이 물을 베듯 어차피 떨어뜨려놓아도 다시 물처럼 붙는 건가?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요즘 생각해 보면 그만큼 부부 사이에 '싸움'은 칼로 물을 베는 것처럼 그걸 시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는 말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이 사람에게 내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칼을 꺼내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 결국 어느 한쪽의 마음이 갈갈이 찢어져 그 둘 중에 과연 누구 하나라도 이기는 날이 온다면, 그게 과연 이겨도 이기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부부는 '잘' 싸워야 한다고 한다.
부부간의 언쟁은 또 다른 얼굴의 '대화'이다. 그리고 대화는 부부간의 '소통'을 의미하고 소통은 곧 가정이라는 샘물의 물줄기 와도 같다. 소통이 멈추면 그 가정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아 썩어 고이는 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물줄기를 양분으로 삼아 자라난다. 그렇기에 '부부간의 소통'은 결과론적으로 비단 부부 둘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아이를 키워낼 미래의 행복한 가정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부모의 소통을 보며 사회와 그리고 본인의 미래의 가정과도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다.
사람들이 나에게 결혼 조언을 줄 때는 꼭 가정이 화목한 사람을 만나라.라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한다. 예전에는 단순히 이혼 가정이나, 폭력가정 아니면 편부 편모 가정을 피하라는 이야기 인가 싶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연애를 하면서 깨달았는데 그것은 '소통'을 할 줄 아는 가정에서 잘 자란 남자를 만나라는 이야기였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낀다. 양쪽 부모가 계셔도 서로 매일 윽박지르며 싸우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집에서 자라게 되면 알게 모르게 그와 나의 대화도 그와 비슷하게 어그러져 가게 된다.
예전에 만났었던 영국인 친구 중에 이혼 가정에 새로운 계부가 있던 가정에서 자랐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가족은 서로를 잘 존중해 주며 가족 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아는 가정이었다. 그렇게 잘 배운 사람과의 연애는 나조차도 편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원래 문제가 생기면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조금 언성이 올라가자, 그가 내 손을 잡고 나에게 다정하게 다독이며 " 나는 우리가 꼭 이렇게 화를 내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우리는 서로 사랑하잖아. 의자에 앉아서 네가 왜 화났는지 나한테 이야기해 줄 수 있어? 듣고 싶어."라고 했다. 센세이셔널한 충격이었다. 순식간에 나의 마음속의 화는 사라져 버렸다. 그래 맞아.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내가 이렇게 화낼 필요가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제대로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에게 '소통'하는 법을 알려준 것이다.
대화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력하다. 그리고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위대하며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이 세상에 나 만큼 사랑하는 또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해낼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어렵지만 마음의 위안이 되는 일이 아닐까?
한 가정발전소에서 한 설문조사에서 ‘부부 사이의 대화가 충분한가’라고 물었는데 설문조사 응답자의 43.7%는 ‘보통이다’라고 대답을 했었고 37.0%는 ‘대화가 부족하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충분한 대화를 나눈다’라는 의견은 19.3%에 불과했다. 또 우리나라 부부 3쌍 중 1쌍은 하루에 채 10분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나는 평생 아무도 이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그들이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