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의 자두 Jul 15. 2023

'갑'은 甲이다.

세상에 좋은 '갑'은 없다.

사진 출처 : unsplash


'PM님. 내가 평소에는 좋은 사람이지만, 갑질 한 번 시작하면 장난 아니야. 알아?'


전화를 받고 있는 손이 떨리고 심장은 쿵쿵 뛰었다. 직접적으로 받는, 일명 '갑질'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갑' 님께서는 일정이 딜레이 될 것 같다는 내 말에 화를 내었고 여태 문제없다면서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면 어쩌냐는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내 잘못이 맞았다. 초보 PM인 나는 일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개발 종료 3주 전 던진 나의 말에 '갑' 님께서는 '을' 중의 '을'인 나에게 '야', '너'라는 말도 서슴지 않아했고 반말까지 하며 쏘아붙였다. 


'야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떡하냐? 진작에 말하던가 뭐 하는 짓거리야 이게. 너 혼자 프로젝트해?'


마지막으로 한 대화에서 눈물이 고여 터지기 직전이었으나 꾹 참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7월 말까지 개발 끝내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거야. 알아? '

'네.. 7월 말까지 개발 끝내겠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일정 내로 못하겠다고 하는 건 뭐야. 장난해?'

'죄송합니다..'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았던 언어와 태도에 결국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눈물이 터져버렸다. 무서웠다. 그리고 과거 나의 트라우마로 잡혀 있는 상사들의 폭언이 스쳐 지나가면서 숨쉬기가 힘들어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화장실 구석 칸에서 쉴 새 없이 터지는 눈물을 휴지로 꾹꾹 누르며 달래는데 쉽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지금껏 들어왔던 말들 중에 가장 무서운 말 같았다. 책임자의 위치에서 듣는 말이었기에 충격이 꽤나 컸던 것 같다.

눈이 퉁퉁 붓고 코가 빨개져서 사무실에 돌아오니 팀원들은 무슨 일이냐며 물었고, 나는 내 잘못 때문에 생긴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팀원들을 달랬다.


우리의 '갑' 님은 평상시 맛난 음식을 잘 사주었는데, 사줄 때마다 프로젝트를 제 날짜에 끝내면 더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며 우리에게 배려를 많이 해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결국 나는 고민 끝에 일정이 딜레이 될 것 같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돌이켜보면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는 게 맞았는데 왜 그랬을까?


오후 업무를 진행하던 중 또다시 '갑'님이 전화를 하셨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전화를 받았다. 오전에 했던 말 중 일정이 밀릴 것 같다는 말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한 번 던져진 이 말에 나는 전화를 끊고 화장실로 달려가 눈물을 훔쳤다.


'야, 내가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갑질 시작하면 끝도 없어. 무조건 일정 지켜. 밤을 새우던 주말에 나와서 일을 하던 무조건 지켜. 알겠어?'


이제는 '갑질'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어졌다. 누가 본인이 갑인 거 모르나? 우리 '갑'님께서는 본인의 위치에 대한 자부심이 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일정 내로 못 끝낼 것 같다는 말을 했으니 좋아할 리가 있나. 나도 참 멍청했다. 이 날 이후로 '갑'님께서는 우리가 문의를 할 때마다 빨간색 글씨로 답장을 해주셨다. 매 순간순간이 경고였다. 방화벽 신청이나 서버 접근 신청 문의 시에는 신청서를 캡처만 해서 보내버리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무서웠다. 우리 팀원들은 야근과 주말 출근을 하며 일을 하는 중이다. PM 잘못 만나 고생하는 팀원들 때문에 최근 들어서 나는 불면증과 공황 발작이 잦아졌다. 이번 주말은 출근하지 말고 쉬라는 말과 함께 나는 주말에 병원을 찾았다. 딱히 해답이 없었다. 나 스스로 털고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정을 맞춰서 끝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진료가 끝나고 어김없이 약 봉투만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도 잘못이 있지만 과연 이 상황까지 오게 된 이유에 '갑'의 잘못은 없을까? 대놓고 물어볼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며 여기에서라도 '갑'님에게 묻고 싶다.


'갑'님. 당신은 우리가 요청한 것에 대해 일처리는 다 하셨는지요? 일처리를 늦게 하는 바람에 우리 프로젝트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도 있습니다. '갑'님, 갑질하실 때 본인이 처리 안 해서 늦어진 것들도 고려해서 갑질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을'은 물러나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