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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덕여 May 08. 2023

2023년 5월을 처음 살고 있는 30대 남자의 단상

4월와 5월 사이

1. 

 세계재즈의 날 그리고 생일. 4월 30일 내가 있고 세계재즈의 날이 생긴 그런 날이다. 매년 어떻게 보냈었는지 일일이 기억나진 않지만 나름 특별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노력을 했을 그런 날이다. 작년엔 오롯이 ‘특별했었던’ 누군가와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데 올핸 꽤나 많은, 심지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집에 와 나를 축하해 주었다. 우리는 마시고 취하고 순간 분에 넘칠 행복을 느꼈다.



 우리들은 세계재즈의 날과 나의 생일을 맞이하여 듀크 앨링턴부터 BBNG의 음악을 들으며 그렇게 먹고 마시고 취했다.



* <City of Mirrors - BADBADNOTGOOD>, 재즈의 현재

https://www.youtube.com/watch?v=JF072-87grI



 축제(?)는 28일(금)부터 시작되었다. 멀리서 와준 그녀들과 먹고 떠들고 마시며 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과거 선배란 칭호가 무색하리만큼 그녀들은 본인들의 시간 ‘선‘ 위에 나보다도 더 씩씩하게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학업, 결혼, 부동산 육아 등 형태는 달랐지만 각자의 길 위에 장애물과 맞닿들여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장애물’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음악을 듣고 술을 마시며 서로 위로하였고, 그럼에도 삶은 살만한 것이라 자위하였다.






 축제(?)의 당일이라고 할 수 있는 30일에는 또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하였다. 뭐 하고 싶냐는 물음에 나는 케밥을 먹고 영화를 보자고 하였다. 대단할 것 없지만 이태원에 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인 케밥을 먹었고, 그만큼 사랑하는 영화인 <파벨만스>를 단체로 관람했으며, 집으로 돌아와 마시고 떠들며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였다.



 우리는 느지막이 일어나 간단히 해장을 하였고 돼도 안 되는 B급 공포영화를 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곤 늦은 오후 일어나 낙산공원에 가 2023년 5월 처음으로 지는 해를 함께 보았다. 묘하게도 뜨는 해와 지는 해를 하루에 같이 본 날이었다.



100가지 고통과 절망 속에서 피어난 하나의 꽃 같은 더할 나위 없는 날들이었다.





*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 Ella Fitzgerald and Duke Ellington>, 재즈의 과거

https://www.youtube.com/watch?v=myRc-3oF1d0




2.

 이사. 복잡한 부동산 문제로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 없고 돈 없는 자의 설움이랄까.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정상이 비정상이 되어버린 듯한 미친 세상에서 태어나서 죽기까지 어떤 가치관과 ‘생’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하루에도 열두 번씩 혼란을 겪는데 특히나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존재의 진앙은 크게 요동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는 무엇이 문제였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은 나의 ‘실패’로 귀결시키게 되는데, 이럴 때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엔 나는 아직도 유순하고 여전히 병신 같음을 스스로 마주한다.



 여하튼 그렇게 이사를 하게 되었고 멀지 않은 곳에 명의는 내 집이지만 내 집이 아닌 그런 ‘나의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사하기 전 이 집에서 나는 대략 전세 한 사이클인 2년여 동안 살았다. 누구에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에겐 그 기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무수한' 일이 있었다. 



 얼떨결에 이사와 놀랍게도 이사 첫날 한 여자와 만나게 되었고, 좋은 순간도 많았지만 좋았던 모든 것이 무너질 만큼 좋지 않은 끝을 맞이하였다. 또한 인생에서 다신 겪고 싶지 않은 큰 실패로 겪었으며, 아직도 이해가지 않은 이유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신당했으며, 건강에 문제가 생겨 처음으로 수술이란 것을 받아보기도 하였다.



 누군가에겐 평생에 걸쳐 일어날만한 모든 일이 나에겐 이 집의 시작과 끝에서 일어났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집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이 구역이 재개발로 인해 과거의 역사로 사라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돈이 있었으며 이 집을 사고 싶단 생각을 늘 했으며, 이사가 결정되었을 땐 '오랫동안 만난 여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차이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 마주한 햇살이 늘 좋았고, 묘한 나무 냄새와 이 집에서 느껴지는 밤의 냄새가 좋았다. 또한 퇴근 후 노을 진 언덕에 모여 앉아있던 할머니들의 모습이 좋았으며, 늘 뛰던 운동장의 공기도 늘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동네에서 마주한 고등어태비 나비 1호와 치즈냥이 나비 2호를 사랑했다.



새롭게 마주 할 집에서의 나의 삶이 어떨진 모르겠으나 그곳에서의 2년여는 잊지 못할 것 같다.







3.

 확신. 빨간 물이 잔뜩 들어서 그렇지 놀랍게도(?) 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정확히는 부모님이 종교를 가지고 계신다. 이성적으론 이해하기 어려우나 반대로 모든 것이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거지 같은 세상이기에 미치지 않고 중심을 잡기 위해 나 또한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다. 



 물론 '종교인'의 시선에서 봤을 땐 나의 행태와 내 삶의 모습은 자격미달이며, 신을 모욕한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으나 신은 모두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말의 힘을 믿는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가족들을 포함하여 일가친척들은 좁디좁은 나의 새로운 집을 방문하였다. 



 착한 아들까진 바라지 않으나 적어도 폐 끼치는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도움을 요청하지도, 아쉬운 소리도 하지 않았으며, 누가 읽을지도 모르는 '이곳'엔 이렇게 써 갈기면서도 정작 가족들에겐 어떤 '내색' 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그날, '그들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너무도 쉽게 그들의 기준과 다른 나의 삶에 대해 부정하듯 이야기했다. 가구는 왜 이렇게 배치했는지부터 왜 신발이 이렇게 많은지 그리고 돈은 얼마나 모았으며, 지금 받고 있는 연봉은 얼마인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먹고살 건지, 결혼을 하기 위한 조건 등에 대해 나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결정짓고 평가하였다.

 


 나의 실패와 지금 처한 나의 사정에 대해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도 아무 이야기도 하진 않았지만, 짐짓 그들이 보기에 나는 낙제도 아닌 그냥 실패자로서 이 집안에서의 천덕꾸러기에 불가해 보인다. 나는 그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기에 모든 비난을 감내해야 하며, '가족'이기에 '걱정'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나의 자존심과 자존감은 바닥에 내던져진다. 



 각자의 실패가 있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그것은 터부시되며 나는 그들의 '터부'를 막기 위한 방패막이가 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들은 현재를 위한 과정이었고 나의 현재는 결과인 것이다. 


 목 끝에서 '시발 어쩌라고'란 말이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나를 키워주셨던 이제는 곧 구순을 앞두고 계신 외할머니의 모습과 이 집에 얽혀 있는 돈 문제를 생각해 보니 후레자식이 되는 것은 뒤로 미루기로 하였다.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도 모르게 저녁을 먹었고 커피를 마셨다. 집에 반 병 남은  '와일드터키'를 목구멍에 쏟아붓고 싶었지만, '안 좋을 때 절대 취하지 말 것'이란 나름의 철칙을 두고 있기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캄보디아의 역사를 읊어주는 유튜버의 음성을 자장가 삼아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밤 사이 엄마에게 장문의 문자가 와 있었다. 감춘다고 감췄으나 역시 엄마는 다 안다. 보통 무슨 이야기든 본인이 믿는 종교에 기인한 조금은 막연한 말들, '하나님이 다 잘되게 도와주실 거야',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니까 잘돼 거야'와 같은 원론적(종교적인 측면에서)이며 추상적인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이 날의 메시지는 달랐다.



 '지금 당장 힘든데 답답한 말만 한다고 생각할 거 같아 말을 못 할 때도 있어' 



 잘 잤느냐는 인사에 이어 엄마는 나에게 이 말을 시작으로 본인의 확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확신은 종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피조물'로서 나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삶을 생각해 보면 아침드라마는 애교로 느껴질 만큼 여성으로서 이 나라에서 힘든 시간을 겪어 냈다. 그녀는 화려한 20대를 보냈음에도 일찍이 이혼을 경험하면서 자식 둘을 억척같이 키워냈다. 경제적 어려움은 늘 덤으로 따라왔으나 신이 진짜로 존재하는지 그런대로 우리는 버티고 지금까지 왔다. 그런 삶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의 지금 이런 태도가 투정 같아 보여 순간 부끄러웠다. 


 

 엄마가 종교를 통해 확신을 얻듯 나도 어떤 형태의 '확신'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의 확신은 종교에서 시작한 것이고, 나의 확신은 사람에서 시작하는 것이기에 나는 우선적으로 가족들에게 확신을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의 메시지에 기분이 누그러지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 잘난 것처럼 지 밖에 모르는 것처럼 살아도 결국 나는 누군가의 인정을 갈구하고 어떤 형태의 '믿음'없인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뭐가 정답일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 내야 할지 모르겠으나 신의 향한 '확신'만큼 나에 대한 '확신'을 하고 있는 그녀가 있기에 막연히 잘 되지 않을까 싶다.




* 순댓국집에 진리가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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