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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z Nov 04. 2022

어디를 걸을 것인가

2022.10.22

인생에 매우 암울했던 시기가 이전에도 한 번 있었다. 그때도 나는 상실에다가 미래에 대한 엄청난 불안까지 겹쳐 겨우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었고, 그 당시 내가 선택했던 걷기 장소는 안국, 광화문, 청계천 일대였다. 당시 청계천 복원 공사가 끝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더 걸을만했다. 그때는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곳을 걷길 원했으니까. 그리고 그 지역은 항상 사람이 많아 사람 구경하기도 참 좋았다. 당시엔 내가 세상에서 동떨어져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바라보기라도 하고 싶었고, 즐거워하는 연인, 가족, 친구들을 보며 저 사람들이라도 행복해서 너무나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들의 감정에 곁불을 쐬며 버텨냈었다.


이제는 그 때로부터 1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내가 감정적으로 쉬던 그 장소도, 나의 기호나 신체적 여건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이럼 이번엔 어디를 걸을 것인가. 그 답은 우연히 결정되었다.



이렇게까지 여러모로 침체되기 전, 동네 둑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하얀 곰인지 하얀 개인지 알 수 없는 마스코트 네 마리가 줄줄이 걷고 있는 작은 입간판이 둑길에 세워져 있었다. 주변에 섞여 들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경관을 해치는 것도 아닌 기묘한 느낌으로, 방긋대며 줄 맞춰 걷고 있는 네 마리 동물 중 한 마리가 들고 있는 깃발에 ‘경기둘레길’이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아, 올레길 비슷한 것인가 보구나. 요새 지자체에서는 이런 게 붐인가 보지? 대충 이해가 되었다. 다만 내 동네에도 둘레길이라니, 이런 건 보통 풍경이 엄청 좋은 곳에 내는 것이 아닌가, 이런 동네길도 테마길로 삼나, 싶어 의아하긴 했다. 그리고 그때는 그저 잘 기억해놨다가 나중에 심심할 때 검색이나 한 번 해봐야겠다 정도에서 시선을 접고 지나쳤었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는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 마음이 오그라들며 무력함이 심해같이 깊어지더니, 결국 걸을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둑방에서 보았던 마스코트 네 마리가 떠올랐다. 무엇도 크게 결정하고 계획하기 어려운 상태의 나였지만, 손가락 움직여 핸드폰으로 정보 검색하는 것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고, 구글링을 통해 경기둘레길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것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는 경기 도민이니까, 거창한 여행 계획을 야심 차게 세울 필요가 없이, 그때그때 내킬 때 가면 된다는 점이 제일 끌렸다. 게다가 루트도 이미 짜여 있고, 홈페이지를 통해 패스포트를 신청하면 둘레길을 다니면서 스탬프 모을 수 있게 해주는 모양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패스포트나 수첩류는 대부분 별도 배송비 결제를 해야만 배송해주던데, 경기둘레길 패스포트는 어떤 모양새로 오는지는 몰라도, 이름, 주소, 전화번호만 적고 신청하면 보내주는 시스템이었다. 이 또한 내가 경기둘레길을 걷기로 마음이 기운 것이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불안하고 무기력하고 우울한 사람이 설레는 마음으로 계획 세우고 적극적으로 결제까지 해가며 실행한다는 건 있기 힘든 일이니까. 일단 무료니까 신청해보지 뭐, 안 오면 말고 하는 마음이었다. 또 패스포트가 안 오면 뭐 그걸 이유로 안 가도 되겠다는 변명거리도 생기는 셈이니 좋았다. 불안이 높을 때는 퇴로가 없는 느낌만큼 지옥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청했다.


걷는 사람들은 많다. 올레길도 걷고, 더 멀리는 산티아고 순례길도 걷는다. 물론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걷거나 이국적인 경험들을 한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나도 기회가 된다면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곳까지 찾아가는 사람들은 혹여 슬픔이 있더라도 깊이 침잠된 상태까지는 아닌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무기력에 빠져있는 사람이 숙박을 예약하고, 비행기표를 예약하지는 못 할 테니까. 게다가 사실 그렇게 한 번에 긴 시간 빼는 것이 여의치 않는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걷기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뚜렷하지도 않은 내게는, 이 정도 거리에 접근 난이도가 이 정도인 것이 적당해 보였다. 물론 전체 거리가 긴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은 적당히 끊어서 걸으면 될 테니까. 무엇보다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고도 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설레는 마음으로 걸으려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 더 알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걷기로 한 것이다. 이번엔 경기도 둘레길을.



무료여서인지 온라인으로 신청한 패스포트가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곧 신청한 지 1주일이 되지만, 공짜이기도 하고 끝끝내 오지 않아도 그리 손해 볼 거 없으니 마음이 너그럽다. 다만 오기로 한 것이 오지 않으니 미묘하게 조금 더 궁금해지긴 한다. 패스포트와 밀당하는 느낌이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자유도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는 느낌이 나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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