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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z Nov 08. 2022

잠깐 맛 본 경기둘레길

쉬어가기 2022.10.25

잠깐 정신 판 사이 단풍철이 지나가버리길 한두 해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찰나다 싶을 만큼 짧은 기간에, 일정을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하여 단풍 구경을 챙겨 다니는 사람들을 뉴스 화면을 통해 볼 때면, 나 빼고는 다들 참 부지런하고 행동력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 추석에, 단풍이 가장 예쁜 때 단풍 구경을 가자며 할머니와 새끼 걸어 약속을 해두었기 때문에, 단풍철을 놓쳐서는 안 되는 매우 실질적인 이유가 올해의 내게는 있었다. 이 때문에 추석 이후부터는 매일의 날씨와 변해가는 계절의 색을 긴장감 가지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 주가 좋은가, 다음 주가 더 좋은가 따져보는 사이 노랗게 익은 벼는 추수되기 시작했고, 날씨는 맑으려나 너무 추워지지는 않을까 재는 사이 여기저기서 올해 단풍은 언제가 절정 일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주를 더 기다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리 쥐고 고심을 하다가, 단풍 나들이 장소로 마음에 담아둔 곳을 사전답사 다녀오는 것이 때를 정하는 데 제일 도움이 되겠다 싶어 차를 몰고 직접 한 바퀴 둘러보고 왔다. 또 어른 모시고 가서 헤매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 길이나 주차 상황을 미리 봐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할머니를 모시고 다녀오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첫 번째 장소는 구사리의 은행나무길. 최근에 구입한 여행책자에 소개되어 알게 된 곳이다. 차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점이 아흔을 넘긴 어른 모시고 가기에는 상당히 유리한 요소라 수첩에 그곳을 꼭꼭 눌러 메모까지 해두었다. 그리고 마음에 둔 두 번째 장소는 금광호수였는데, 이곳은 나 또한 한 번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곳이고 마침 구사리에서 그리 멀지도 않아 한 번에 묶어 가보기로 했다.


일단 내가 본 여행책자에는 구사리 은행나무길의 길이가 1.2km에 달한다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가 본 구사리 은행나무길은 기대보다 길이가 짧아 조금 김이 빠졌다. (은행 단풍을 볼만한 구간은 실제로 약 600m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차량과 사람의 통행이 많지 않다는 것과 억지로 조성해놓은 공장식 관광명소 같은 인상이 없다는 점은 좋았다. 논두렁을 차 2대가 동시에 지나기 빠듯할 정도로 확장만 시켜놓은 셈이라, 보행로가 따로 없어 산책하기에 적합한 길은 아니지만 아주 짧은 시간 드라이브하기 괜찮고, 잠시 차 세워놓고 사진 찍기는 좋은 길이었다. 굳이 찾아올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다른 곳과의 차별점을 꼽자면 길폭이 넓지 않은 것을 들 수 있겠다. 좁은 길폭 덕에 은행나무를 사진 속에 압축적으로 담을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 될 수 있겠다. 광각 렌즈가 아니라도 양쪽 길의 은행나무가 프레임 안에 넉넉하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반면 좁은 길 폭으로 인한 작은 문제는, 왼쪽 줄의 은행나무들과 오른쪽 줄의 은행나무들에 단풍 든 정도가 다르다 것이다. 아무래도 동쪽의 나무들은 서쪽의 나무들에 살짝 가려져 상대적으로 해를 덜 받기 때문인 듯하다. 눈으로 즐기고 기념사진 정도 찍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대칭이 완벽한 그림 같은 사진을 담기엔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으려나.


구사리 은행나무길이 오래 돌아볼만한 곳은 아니기에 그다음 금광호수로 차를 몰았다. 금광호수는 부등호(<)를 닮은 호수이다. 핸드폰의 위성지도를 보니 < 모양의 움푹 들어간 곳 즈음에 커다란 주차장 있고 거기 ‘박두진 문학길 수변무대’가 있다고 되어있길래 일단 그곳을 구체적인 목적지로 정했다. 나는 금광호수의 북쪽을 돌아 수변무대를 찾아 들어갔는데, 수변무대로 가는 길의 절반의 구간은 구불구불한 길에 호수가 보였다 안보였다 하여 천천히 호수 풍광을 즐기기 좋았고, 나머지 절반의 구간은 매우 넓은 길에 차가 거의 없이 한적해서 치이지 않고 쉬는 느낌으로 운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차를 몰고 약 15분 걸려 도착한 금광호수 수변무대는 넓은 무대만 쓸데없이 휑뎅그레 있으려니 짐작한 내 생각과 상당히 달랐다. 내가 기존에 가봤던 호수길들은 대체로 일단 넓게 틔워 시멘트 포장을 해놓은 경우가 많았고, 나무 데크길이더라도 요란스러운 조명, 금속과 전기자재들을 주렁주렁 설치해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금광호수 위 나무데크로 지은 아담한 무대는 ‘박두진 문학길’의 모음 자음을 풀어 펼쳐놓은 조형물로 장식되어 있었고, 이 아기자기한 무대 뒤로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놓인 데크길이 구불구불 놓여있는 데다가, 그 나무데크길 사이로 수중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데크길 위에 그림자를 드리워주고 있었다. 많은 인원의 수용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장소가 아닌 듯했고, 규모를 크게 틔우고 억지로 장식을 하지 않은 모습이 되려 보기 좋았다. 주말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방문한 평일에는 방문하는 사람 수도 그리 많지는 않았고 방문객들의 연령대도 대체로 높은 편이었는데, 그 때문에 내가 어린 축에 속하는 기분이 묘했다. 머리 희끗한 커플들도 있고, 친구들하고 수다 떨며 바람 쐬러 오신 듯 보이는 나이 지긋하신 여자분들도 계셨다. 수변무대에서 오른쪽으로는 데크길이 약 400m가량 이어진다고 표시가 되어있고, 수변무대 왼쪽으로는 포장이 되지 않은 비포장 숲길이 이어지는데, 할머니와 걷기에는 비포장 숲길보다는 계단 없이 평탄한 데크길이 적당한 것 같아 우선 데크길을 조금만 걸어보기로 했다.


적당한 폭의 데크길은 걷기에 편하면서도 과함이 없었고, 압도할 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히 트인 느낌을 주는 호수 경관 또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호수의 맞은편에는 음식점, 카페, 숙박업소가 간간이 보였지만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촌스러운 간판도 없고 위압적인 높이의 건물도 없어, 사람의 티는 있으나 그것이 경관에 큰 흠이 되지는 않았다. 감탄할 만큼 빼어난 풍광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은 못 하겠다. 그러나 눈에 띄는 억지스러움이 이 정도까지 없는 호수가 드무니, 귀한 곳으로 충분히 꼽을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할머니와 긴 길 걷지는 못할 것 같아 나는 데크길의 중간까지만 갔다가 다시 수변무대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수변무대를 기준으로 데크길 반대에 있는 숲길을 걸어보았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 호숫가 변을 따라 나 있었는데, 물가와 흙길의 높이가 거의 비슷해 아주아주 완만한 경사를 1~3m만 걸어내려가면 바로 호숫물에 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물과 길이 가까우면 위험하다고 펜스를 쳐놓거나 흉측한 팻말을 일정 간격으로 꽂아놓는 경우가 흔한데, 이곳은 걷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은 듯했다.


항상 궁금했다. 왜 산이나 강이나 계곡이나 호수에는 경고문을 도배하듯 붙여놓아야만 하는 걸까? 겉보기와 달리 물이 갑자기 깊어진다거나 멀리서 보아 벼랑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 힘든 위치에 있는 경고문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절벽임을 알 수 있고 누가 보아도 깊은 물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곳에 반복적으로 박아놓은 경고문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절벽 가까이 가면 떨어질 위험이 있고 강이나 계곡이나 호숫물 가까이 가면 물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 알려줘야만 알 수 있는 사실인가? 자신이 사고를 당한 것은 경고문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경고문의 부재를 탓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나? 낭떠러지나 물가에 다가가면서도 낙상 사고를 당하거나 물에 빠질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팻말의 경고문이 얼마나 실질적 효과가 있긴 할까? 박두진 문학길은 아직 사람이 많이 찾지 않기 때문인지, 아직 그런 문제가 발생한 적이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현재의 자연스러운 모습아 훼손되는 일 없이 가급적 오래 유지되길 바라본다.


사람의 억지스러움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박두진 문학길 숲길에는, 길 안내표지판을 제외하고 사람이 만든 인공물은 딱 세 가지가 눈에 띄었는데, 하나는 박두진 시인의 시를 나무판에 새겨 걸어놓은 것, 둘은 호수나 숲의 경관을 바라보기 좋은 곳에 놓인 나무벤치, 셋은 경기둘레길임을 알리는 초록빨강 두 겹의 리본이었다. 그런데 이 셋 모두 걷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도움을 주거나 더 즐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들이어서, 그 도움의 흔적들이 불편하지 않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시 즐기는 법을 잘 모르는 나인지라 시를 접할 기회를 잘 만들지 않는데,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시에 손도 내밀어보고, (언제나처럼 시와 친구 됨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좋은 시도였다.) 나무와 흙길에 섞여 색이 튀지 않는 점잖은 벤치는 다음에 와서 꼭 앉아 독서를 해보겠노라 마음먹게 만들었다. 다만 세 번째인 경기둘레길 알림 리본. 서낭당 리본 색상 같은 현란한 빨강과 연두의 색감이 워낙 튀어 눈에 거슬렸지만, 길안내 리본이라는 것이 눈에 잘 띄지 않으면 의미 없고 때로 위험할 수도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건가 싶기도 했다. 적당한 대안이 되어줄 만한 색이 무엇 없을까 혼자 생각을 해보았는데 적당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 언제나 방긋 웃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바람직한 상으로 삼는다. 이의제기를 하는 사람에게 “너는 그게 문제야”라던가, “넌 그래서 안돼” 식의 저주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물론 자기 스스로 행복이나 만족감을 찾지 못해 타인을 감정 쓰레기통 삼으려는 태도는 문제가 있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더 좋은 방법, 더 나은 방법이 있지는 않을지 하는 생각에 제기하는 이의를 문제 삼는 것도 문제 아닌가. 둥글둥글한 사람은 옆에 두기 편안하겠지만 결국 변화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가져온다. 게다가 “이제까지 대충 다들 적당히 그렇게 해왔는데 왜 너만 불편해하는가”하는 말은 소수인 네가 다수를 기준 삼아 입 다물으라는 폭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생산적인 이의제기만 하는 사람은 못 되다 보니, 지레 찔리는 마음에 이런 얘기를 목소리 높여서까지는 못하겠다. 그럼에도 이런 기회에 슬쩍 말을 꺼내보는 것은, 말하는 태도 자체가 순순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예민하고 피곤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경험이 쌓인 이의 소심한 항변 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숲길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머리에 생각은 많음에도 마음과 기분은 편안했다. 굳이 흠을 찾자면 저 멀리 호수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차 소리 정도가 되겠지만, 사람도 없고 음악 소리도 없는 그 길에서 주로 들리는 소리라고는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 내 발에 밟히는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알 수 없는 산짐승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두어 마리의 새가 내는 울음소리 정도였다. 특히 차박, 차박 불규칙하게 낙엽 떨어지는 소리는 눈 내리는 소리처럼 주변이 조용하지 않으면 듣기 어려운 소리라 더 귀하게 느껴졌다.


걷다 보니 혜산정이 물가 쪽에 있다는 길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그쪽으로 향하는 길이 계단 없는 흙길에 내리막길이라 되올라오는 길에 숨찰 것이 귀찮아 갈까 말까 잠시 고민을 했으나, 기왕 온 거 한 번 내려가 보기로 했다. 걷는 동안에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그간 나도 모르는 새 물길에서 조금씩 멀어지며 내내 완만한 오르막을 걸어왔었나 보다.

나무들 사이로 백 미터 조금 안 되어 보이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다시 시원한 호수가 보이며 무대의 커튼이 걷히듯 시야가 확 트였다. 만처럼 튀어나온 땅에 아담한 화단이 가꿔져 있고, 그늘막과 테이블까지 일체형인 벤치 두 개, 아담한 정자인 혜산정 그리고 캠핑카를 개조해 꾸린 작은 카페 한 동이 영업을 잠시 쉬는 건지 긴 시간 쉰 건지 그 어떤 실마리도 주지 않고 놓여있었다. 혜산정 주변은 아까 보았던 수변무대와 같이 과하지 않은 크기와 그 크기에 맞는 적당한 꾸밈으로 아름다웠고, 처음 꾸밀 때만 신경 쓰고 그 후에는 내버려 둔 듯 낡고 지저분한 느낌이 드는 곳들과는 달리 단정하게 돌본 듯 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가을로 접어든 지 한참이어서 화단의 꽃은 이미 다 져 있었지만, 이곳도 봄여름에 적절하게 가꿨었다면 참 예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혜산정까지만 돌아보고는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걷다 보면 끝도 없을 것 같아 제대로 걸을 준비를  하고 와서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짧은 산책이 너무 즐거웠어서 다음에 둘레길을 걸을 것에 조금 기대감마저 들었다.



그나저나 둘레길 스탬프 북은 대체 언제 오는 것인가. 신청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고 있다. 이러다가 한겨울에나 걷게 될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성 구사리 은행나무길 : 위성 좌표 <북 37.01437°, 동 127.30364°>가 시작 지점이다. 600m 길의 중간 지점인 위성 좌표 <북 37.01729°, 동 127.30370°> 주변 구석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면 좋다.

박두진 문학길 수변무대 주차장 : 위성 좌표 <북 36.99398°, 동 127.33637°>

혜산정 위치 : 위성 좌표 <북 36.99313°, 동 127.3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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