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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테나 Dec 18. 2023

무도인의 길을 걷는 캐내디언

매니토바주에서 태어나 비씨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베트남계 캐내디언 빌

빌을 만난 건 벌써 9년 전이다.  당시 7살이던 아들이 동네 도장에서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을 때였다.  인구밀도가 꽤 높은 동네임에도 당시 근처 태권도 도장은 이곳밖에 없었다.  육아와 일에 지친 엄마에게 최고의 도장은 집에서 제일 가까운 도장이었기에 딱히 검색을 해 보지도 않고 정했다.


백인 관장님과 갈색피부의 사범이 있는 도장이었지만 그다지 이질감은 없었다. 태권도가 세계로 뻗어나간지 벌써 몇십 년.  태권도는 더 이상 한국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렇게 다니기 시작한 도장에서 까무잡잡한 피부와 쩌렁쩌렁한 목청, 그리고 반짝이는 눈을 가진 빌을 처음 만났다.  다년간의 태권도와 주짓수로 다져진 지극히 무도인다운 건장한 체격에 쾌활하고 털털한 성격이지만, 도복 아래 팔뚝에 새겨진 화려한 문신이 슬쩍슬쩍 눈에 띈다. (엄마한테 들키면 맞아 죽는다며 아직도 본가에 갈 때는 숨긴다고 한다.)

 

빌은 베트남계 캐내디언이다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 난 필리핀계라고 생각했다).  2남 2녀 중 둘째 - 위로 누나 한 명,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다.  1980년, 그의 부모님은 난민 신분으로 캐나다에 도착했다.


1975년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게 함락되었을 당시, 그들의 나라는 20여년의 전쟁으로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수많은 난민들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고 그들의 처참한 실상은 캐나다에까지 전해졌다.  급기야 1978년에는 캐나다 정부까지 인도차이나의 난민을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캐나다 정부가 약속한 수용인구는 단 7천 명 -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등을 합친 숫자이니 한참 부족한 숫자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국제기구와 기독교 교구가 함께 움직였다.  베트남의 난민들과 캐나다의 교인들을 연결해 주는 일종의 매칭 조약을 설정하고, 일반 캐내디언 몇 명이 난민을 스폰서 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난민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바란다면 그들을 캐나다땅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들에게 살 곳을 주어야 하고, 언어를 가르쳐주어야 하며, 경제적인 자립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더더욱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게 교인 대여섯 명이 한 가족을 스폰서 하는 식으로 1980년 4월경에는 6만 명의 난민들이 캐나다에 도착했다.*


(*그렇게 난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캐나다 국내에선 반발도 있었다고 한다.  영어를 전혀 못하고 캐나다에 연고도 없는 난민들이 결국에는 캐내디언들의 짐이 될 것이란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있었고, 70년대 당시 캐나다도 딱히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던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히 캐나다의 경제는 늘 고만고만하다.  호황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빌의 부모님들도 그렇게 캐나다로 오게 된 난민들 중 하나였다.  매니토바의 Baptist (침례교) 교회 교인들의 도움으로 따로따로 캐나다에 오게 된 둘은 교회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을 스폰서한 교회가 매니토바주**에 있었기에 그들의 삶의 터전 또한 매니토바주에 있는 위니펙시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네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캐나다 내에서 난민구조 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했던 기독교 교단 중 하나가 메노나이트 교단이었는데 그 교단이 캐나다의 초원지대 (알버타주, 사스캐치원주, 매니토바주)에 많이 퍼져있다.)




매니토바주에서 그나마 가장 번화한 도시가 위니펙이지만, 밴쿠버나 토론토에 비하면 시골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해도, 밴쿠버나 토론토보다 유색인종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다.  빌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학교에 유색인종이 거의 없었고, 백인들과 원주민 계통이 대부분이었다.  


장남 맞고 다닐까 걱정이 되었던 그의 아버지는 6살이던 빌을 태권도 도장에 보냈고, 그의 태권도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실제로 학교 끝나고 집에 가던 길에 이유 없이 다구리를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태권도를 배워도 여럿이 갑자기 덤비면 어쩔 수 없다.)


태권도로 운동을 시작했으나, 지금 그가 가장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 것은 주짓수다.  올해로 13년 차 주짓수 선수가 된 그는 주짓수에 꽤 심취해 있는 듯했다.  


매니토바에 가니 이런 모닥불을 마당에다 피울 수 있더라는...


나:  그런데 태권도를 하다가 왜 갑자기 주짓수를 하게 된 거야?  


빌:  15살 때쯤 온 가족이 밴쿠버근교로 이사를 왔어. 처음엔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게 너무 싫었거든.  친구들도 다 위니펙에 있었고.  그런데 막상 와 보니까 여기가 너무 좋은 거야.  유색인종도 많고 훨씬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어.  오자마자 새 친구들을 만들고 좋았어.  그때 oo 고등학교를 들어갔는데, 11학년쯤이었나? (한국으로 치면 고2쯤 되겠다) 어떤 애들이 쉬는 시간에 빈 교실이나 체육관에 둥글게 모여 앉아 있는 거야.  원 중간에는 둘이서 대련을 하고 있고...  (당연히 학교에서는 허락되지 않은 대결이었다.)  


신기해서 나도  친구들이랑 가서 구경을 했지.  그러다가 나도 대련에 참여했는데 나보다 훨씬 작은놈한테 완전히 발렸어. 그때 나는 태권도 유단자였고 그 녀석은 주짓수를 한지 한두 달 밖에 안 된 놈이었는데... 그때 너무 충격을 받아서 주짓수를 배우기 시작했어.  


나: 파이트 클럽 같은 걸 한 거야?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가만 놔둬??


빌: 맞짱을 뜨거나 싸움을 한 건 아니고 나름대로의 룰이 있어서 그냥 운동하는 애들 열댓 명이 모여서 대련을 했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당연히 선생님들이 허락한 건 아니지. 그렇지만 나쁜 짓을 하는 걸 아니란 걸 아는 선생님들은 모르는 척 해주시기도 하셨어.. 

  

그렇게 주짓수에 빠졌단다.  재밌는 건 같이 주짓수 강습을 진행하는 다른 사부도 그때부터 친구였던 고등학교 동창이란다.  (그들의 모교는 도장에서도 가깝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이 운동하던 친구들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대학교로 진학했다. 무려 회계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경영학을 전공한 지 3년 차 - 1년 만 더 하면 졸업이었는데 갑자기 숫자가 너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평생을 회계사로 살 자신이 없었다.  


마침 도장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알바를 하고 있었고, 관장님은 같이 도장을 꾸려나갈 파트너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이 도장의 일원으로 눌러앉기로 결정했다.  결정은 쉬웠는데 차마 부모님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 즈음, 슬그머니 학교를 그만두고 도장에 말뚝을 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부모님의 반대가 컸던 건 당연하다.  대체 무슨 소리냐, 평생 태권도 사범으로 먹고 살 작정이냐, 그렇게 해서 얼마나 벌겠냐.  결국엔 관장님이 재무제표를 가지고 와서 설득을 했다고 한다.  회비로 들어오는 금액과 비용 내역,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수익이 얼마인지.  생각보다 긍정적인 자료를 보고 그제야 부모님이 한 발 물러섰다고 한다.  지금도 태권도/주짓수 사범이라고 하면 그걸로 밥벌이는 되냐고 묻는 친척들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도장도 가지고 있고 학생수도 많은 걸 보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도장의 인기는 사범과 관장이 태권도 또는 주짓수를 얼마나 하이 레벨로 하느냐에 달린 건 아닌 듯하다.  빌이 운동에 진심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진정한 슈퍼파워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능력이다.  


왜 그런 선생님들 있지 않나? 아이들 이상하게 끌리 선생님들?  어린이집에만 가도 그런 선생님들이 있다.  그 선생님 반 아이들을 빗자루질을 시켜도, 장난감 정리를 시켜도, 신이 나서 한다.  빌에게도 그런 이상한 능력이 있다.  아이들 앞에서 무게를 잡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빌에게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은 까르르 웃기도 하고, 장난치며 구르기도 하고, 맹렬한 발차기를 날리기도 한다.  태권도를 잘 가르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즐겁게 운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운동신경이 제로인 나는 그저 내 아이가 즐겁게 운동을 하길 바랬기에 100% 만족했다.)  


 도장다니다 보니 다른 곳도 다 그런 줄 알았다.  다른 곳에 가보고 나서야 알았다.  이런 사범이, 이런 도장이 많지 않다는 걸.  코찔찔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소위 똥군기를 잡는 곳도 있다는 걸.  


아직은 한창인 나이. (서른하나 면 아직 애기...) 뭘 좋아하는지 물으니 운동을 좋아한다고. 일을 안 할 때도 주짓수 트레이닝을 하거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단다 (정말 뼛속까지 무도인이다).  심지어 크리스마스에도 도장에 모여서 주짓수를 한다.  운동 말고 뭘 좋아하냐고 하니,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좀 놀랐다.  워낙에 바른생활 이미지라서 술도 안 할 줄 알았는데... 심지어 소주를 좋아한대서 깨갱했다. (정작 한국인인 나는 소주를 전혀 못 마신다.)  


그가 회계사가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즐겁게 무도인의 길을 걷는 빌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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