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여자가 야망을 가지면 생기는 일
살다 보면 생기는 희한한 우연들이 있다. 연말 휴가를 앞두고 비행기에서 읽을만한 책을 찾던 중, 하필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걸 왜일까.
잡지사 기자 모니크에게 어느 날 갑자기 로또와 같은 행운이 찾아온다.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배우 에블린 휴고가 인터뷰를 하겠다는 의사를 회사에 전달했다니. 것도 저를 콕 집어서? 60년대부터 80년대를 걸친 할리우드 대표 섹시퀸이었던 에블린이? 그뿐이 아니다. 그녀는 무려 7번의 결혼 경력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기자에게 얼마나 좋은 먹이감소재인가.
잡지사에서 그다지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한 모니크는 영문을 알 수 없다. 대체 왜 나를?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 에블린에게서 더 놀라운 제안을 받는다. 인터뷰는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며 그녀의 삶에 대한 책을 써달라 한다. 보상은 필요 없고, 있는 그대로 다 말해줄 테니 (대중이 궁금해하는 7번의 결혼의 진실도 포함해서) 가감 없이 쓰되,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출간은 그녀가 죽고 난 후에 할 것.
왜 이런 노다지를 무상으로 저에게 던져주는지, 뭔가 불안하다. 에블린의 전기? 누가 써도 큰돈이 될 책인데 이런 기회를 그냥 덥석 받아도 될까? 무슨 꿍꿍일까? 망설이는 모니크에게 에블린이 덧붙인다.
인생에서 그냥 주어지는 건 없어. 원하는 게 있으면 빼앗아 와야 해. 그리고 이 일이 끝날 때가 되면 넌 날 증오하게 될 거야.
(이런 미스터리를 깔아주면 모니크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일단 Go 할 수밖에. 독자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덫에 걸려들게 된다.)
그렇게 에블린의 스토리가 시작된다. 미디어에 알려진 내용이 아닌, 떠도는 소문이 아닌, 온갖 할리우드 프레스의 추측성 기사가 아닌 진짜 그녀의 이야기가.
에블린의 일대기는 흥미진진하다. 뉴욕 헬스키친에서 지지리도 가난하게 자란 에블린은 11살에 엄마를 잃고 홀아비 밑에서 자란다.
가난한 이민자 2세 소녀에게 미모는 축복이 아니다. 권력자의 눈에 띄면 아비의 손에 팔려갈 것이고, 운 좋게 강제결혼을 피한다 해도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결국에는 위험에 빠질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누군가는 그녀를 그저 꺾기 좋은 꽃으로 볼 것이기에 어떻게든 헬스키친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렇게 오로지 빈민가를 벗어나기 위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를 할리우드로 데려다 줄 첫 번째 결혼.
(Hell's Kitchen - 맨해튼의 한 지역. 90년대 이후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지금은 힙한 동네가 되었으나 극 중 에블린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40년대에서 50년대에는 아이리쉬 이민자들과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가난한 동네였다고 한다. 인종 간의 갈등뿐 아니라 갱단의 알력다툼으로 범죄의 온상이기도 했던 곳이라고.)
에블린의 7번의 결혼 중엔 사랑에 빠져서 하게 된 결혼도 있고, 흥행을 위한 전략적인 결혼도 있으며,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위장결혼도 있다. 에블린의 예언처럼 그녀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 모니크는 에블린을 증오하게 된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거짓을 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기도 했다고. 하지만 후회는 없다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 온 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것들 - 그중 어떤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나 독자는 쉽게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학대를 견뎠던 순진한 에블린과 배우로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덤빈 에블린의 여정을 함께했기에. 지키기 위해 숨겨야했던 그녀의 단 한 사람을 알기에.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로맨스도 있고 미스터리도 한 스푼 들어있다. 여행길에 읽어도 좋고 그저 현실도피를 위해 읽어도 좋을 책이다 (마침 현실도피가 절실히 필요했던 12월이었다). 책에 빠져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게 해 주는 마법이야말로 소설의 순 기능이 아닐까. 시기 적절히 나의 도피처가 되어준 에블린의 이야기가 이렇게나 고마운 건 그만큼 현생이 괴로웠단 뜻이겠지만.